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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고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실수를 하고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래서 주위를 돌아보면 자신을 비롯해서, 죄와 실수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일들이 드러나고 보일 때에, 그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 지혜롭게 잘 처리해서 도리어 서로에게 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으로 미숙하게 다룸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시험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 사이에, 어떤 범죄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범죄한 일'이라고 할 때에, '파라프토마티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행한 악한 범죄라기 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범한 실수나 허물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같은 성경에서는 이를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들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나 배우자를 보면 그들의 잘못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실수와 허물들을 볼 때가 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러한 무지함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죄를 짓고, 실수하고 그것이 허물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들이 숨겨져 있다가 드러나게 될 때에, 그것을 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잘못 처리해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의 드러난 잘못을 처리해야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신령한 너희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회에서 이러한 일들을 처리하는 사람들과 교회의, 신령한 사람들이 처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보면 그러한 죄와 허물들을 보면, 사람들은 흥미있어하고 그것을 들추어서 수치를 정죄를 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이 큰 상처를 받고 그 아픔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세상적인 방법과는 구별해서, "신령한 너희들" 곧 성령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부족하고 허물된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에 온유한 마음을 품고 대하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 전에 있는 갈라디아서 5:23절에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말하면서 그 중에 하나로, '온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허물이 드러날 때에 대하는 태도가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이유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바른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서, 온유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일들을 볼 때에, 그것에 대한 의분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주어야 겠다는 의식도 많이 있게 됩니다. 그러한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이 온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격동하게 됩니다. 강하게 말하고, 강한 처벌을 내려야지 상대방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은 강한 질책과 처벌이라기 보다는, 힘이 없을 것 같은 온유함인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 사람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께 내 밀면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하겠냐고 따집니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그녀의 죄를 정죄하여 돌로쳐서 악을 제거해야 하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보고, 격양되어져서 그 여인을 파멸하고, 또한 예수를 파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여인이 죄로부터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원하셨던 신령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분노와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정죄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그 죄를 범해서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 여인을 다시 회복시키셔서 온전케 하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유한 마음과 온유한 목소리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거친 마음과 강한 처벌이 사람을 바로 잡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도리어 온유하고, 그 사람이 잘못으로부터 돌이켜 회복되기를 원하는 온유한 마음과 태도가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2. 또한,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볼 때에 신령한 사람은, 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의 짐들을 지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와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것이 짐이 되어서 그 짐을 지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잘못과 허물로 인한 짐들을 서로 져 주어야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짐을 서로 져 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의 짐을 져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사람들의 짐을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단순히 실수로 저지른 잘못 뿐만 아니라, 우리의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내 마음과 내면의 깊은 죄와 허물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죄를 보시면서 정죄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기 보다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셨던 일이, 그 죄의 짐, 곧 십자가를 져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대신 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짐을 져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법은 곧 사랑의 법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짐을 져 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 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죄와 허물들을 보게 되면 모세의 율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처벌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율법의 짐을 지어 놓고서는, 자신은 그 짐에 대해서 외면하고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짐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의 짐을 져 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나는 잘못이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져 줌으로서 사랑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의 일이고, 나의 잘못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해서는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짐을 져줄 때에 그것이 또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기회요,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한 마을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가정이 결혼잔치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맞이한 두 가정의 분위기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집은 다툼이 심했고, 한 집은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는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툼이 많은 집에 시집간 며느리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밥을 태운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밥하는 법도 제대로 못 배우고 시집왔냐며 구박을 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는어머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하시는 거 아니세요?”라고 대들었지요. 이러한 모습을 보던 시아버지가너는 어디서 말대꾸하느냐고 야단을 치고, 이것을 지켜보던 남편도 부모에게 대든다고 아내에게 손찌검을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집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이 집에도 갓 시집 온 며느리가 너무 긴장해서 밥을 태웠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말합니다. “아가, 내가 너무 물을 적게 부어서 밥을 태우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미안해했습니다. 시아버지는내가 장작을 너무 굵게 쪼개서 불이 강해서 밥이 탔나 보구나며 며느리를 감쌌습니다. 그 옆에 있던 신랑은내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되었다며 아내를 위로합니다. 며느리는 비록 잘못을 했지만, 그 일로 인해서 가족들이 서로 감싸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은 며느리의 잘못으로 더욱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의 잘못에 의한 짐을 진다는 것은 지기에 불편한 것이지만, 서로의 짐을 져 줌으로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것입니다.

 

3. 그리고 신령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죄와 잘못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살피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3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족하고 죄 된 모습을 보게 되면 자신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보다 더 의롭고 대단한 사람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 속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할지라도, 실체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부족함을 보고 상대적으로 내가 좀 잘 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그 반대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할 때에, 도리어 교만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2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 부족함을 보고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높이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저게 나의 모습이려니 하면서 도리어 자신을 잘 살피는 것이 신령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180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영적인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디 목사님이 계십니다. 무디 목사님께서 전도집회를 위해 스태프들과 함께 한 도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루 밤을 자고서 아침이 되어서 스테프들이 아침 조간신문을 보았는데, 신문들마다 일제히,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써서 보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전날 신문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무디 목사님은 여러가지 바쁜 상황들 때문에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가 난 기자들이 이번에는 '교만한 전도자 무디' 라는 헤드라인으로 신문에 기사를 냈습니다.

그걸 보고 무디 목사님의 스태프들이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무디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신문 기사가 났습니다." 라고 말하며, 목사님께 신문을 보여 주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신문 기사를 쭉 읽어 보시더니 한바탕 웃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씀이  “이 사람들이 사람을 한 참 잘못 봤구먼. 나는 이 신문 기사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교만한데 말일세. 이 정도면 잘 썼구먼.”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겸손하라고 보여주시는 싸인이야, 우리 더 기도하자구"라고 하더랍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사람이 신령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 이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었다고 한다면 이제 그것이 곧 자기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다른 이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내가 지어야 할 짐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다가 보면, 사람들 사이에 죄와 허물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이러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사실 모든 이들이 이러한 죄의 모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인 죄와 허물의 나타남 속에서도 신령한 사람을 이러한 것들을 은혜롭게 하는 처리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먼저, 신령한 사람의 관심은 한 사람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관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죄로 인해서 정죄 받고 상처받도록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일이 관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 온유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기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정죄함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그 짐을 함께 지어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짐은 상대방의 짐이 아니라, 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죄와 허물의 모습, 부족한 모습에 대해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도와주며, 세워주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이러한 허물들이 보입니까? 내 가족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보입니까? 교회안에서, 아니면 직장과 사업터에서 이러한 모습이 보입니까? 그것을 우리로 보게 하신 것은, 그것을 정죄하는 기회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드러난 죄를 온유한 마음으로 품어주고, 서로 짐을 지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의 성품이고,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정적이고 죄로 인한 아픔의 일들에 대해서, 품고, 사랑하고, 함께 그 짐을 져 줌으로서, 도리어 서로의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더욱 믿음으로 세워질 수 있는 관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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