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2017 - 하늘과 땅의 평화 [누가복음 2:10-14] 대림절(2)

by Rejoice posted Dec 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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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에,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른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땅에 평화를 알리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은 태어나실 때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인생을 마감하실 때에도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려고, 유월절 절기 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9:38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이 이 땅의 평화를 선포했고, 예수님 돌아가실 때에 사람들은 하늘의 평화를 찬양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평화를 이루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바램과는 다르게 미움과 다툼, 전쟁의 소식들이 더 많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시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 셨는데 이 땅은 아직도 평화롭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에 따른 평화가 어떠한 의미이고어떻게 그것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때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을 때이고, 역사학자들이 소위 말하는팍스 로마나 Pax Romana ’라고 시기에 속해 있습니다. 라틴어로 Pax는 평화, Romana는 로마, 그래서로마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로마제국은 오랜 동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평화없는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1세기와 2세기경 (기원 전 27 - 기원 후 180)에는, 충분한 영토를 확보해서 대 제국을 이루었기에 영토확장을 최소화하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팍스 로마나라는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진정한 평화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는 전쟁이 없어서 평화롭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평화는 강력한 로마의 폭력적인 군사력으로 억눌려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외적으로는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졌지만, 진정한 평화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의한 평화의 상태가 등장할 때팍스라는 표현을 씁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화가 조성된 것을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에서입니다.

종종 집안에서도 이러한팍스를 만들려는 분이 있지 않나요? ‘팍스 남편’ ‘팍스 아내’ ‘팍스 아빠, 엄마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각자가 주장하는  ‘팍스를 만들려고 하니까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과 하늘에 이루시고자 하는 평화는 이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 보이는 평화의 상태를 보고서 평화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평화의 관계를 통한 평화의 상태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화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거짓된 평화를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가 아닌 불화의 관계가 되었고, 사람들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주는 거짓된 평화의 상태만을 누리면서 문제없다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서 단절된 하나님과 사랔과의 불화의 관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해결해 주셔서 사람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평화의 관계, 화목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했습니다. 죄의 형벌은 예수님이 받으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나님과 죄인들의 관계의 회복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징계의 고난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속에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의 관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평안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는 평안을 이끕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평화롭게 될 것을임마누엘의 약속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불화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너무 불편하고 차라리 떨어져 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사람과의 평화의 관계를 이루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속에서 사람들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가는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평안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강해지고,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의 물질을 추구하고, 힘을 추구하면서 안정감있는 평안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의지할 수록 사람들에게는 더 큰 불안과 염려가 엄습합니다. 물질이 없었을 때에는 마당문을 잠그지 않아도 평안했는데, 이제는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까 담을 쌓고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놓고도 도둑맞을 까봐 불안합니다. 권력이 없었을 때에는 자유로웠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놓쳐 버릴까봐 도리어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물질과 권력, 인기 등은 우리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평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살아가지만 더욱 불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나의 평안””예수님의 평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그 선한 뜻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기에,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속에서 평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평안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속에서 오는 평안함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폭풍우가 내리치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리 임마누엘하시니 평안한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존재로 오셨지만 예수님만 믿으면 무조건 평화의 관계와 상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게 되지만, 세상과는 대적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평화를 빼앗으려고 하는 영적인 싸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려고 하는 사탄의 도전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 국경에는 1904 3 13일에 세워진 “Christ the Redeemer of the Andes” 라는 예수님 동상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 동상은 두 나라간의 영원한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람으로 두 나라가 협력해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뜻 깊은 평화의 동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양국간에 평화가 아니라, 불화가 있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그 동산을 보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상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칠레에는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칠레 사람들이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는 것에 마음이 상하고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유지하자고 만든 예수님 동상으로 인해서,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신문기자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고,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마음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왔지만, 그 평화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영적인 도전이 지속됩니다. 가정안에서도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평화하자고 약속하고서도 그것이 도리어 불화의 씨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적인 싸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검으로 치신 적이 없고, 도리어 베드로가 검을 들어 대적자를 칠 때에, 도리어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과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평화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치고,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물리적인 싸움리 아니라, 영적인 전쟁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으로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오셨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깨뜨리는 도전에 대해서, 불화하며 검으로 맞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물리적인 검과 힘을 내려 놓고,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그 평화의 관계속에서 주시는 평안함으로 맞설 때에,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악한 존재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위해서 취할 영적전쟁입니다.

 

4.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누리는 평화와 평안이, 우리 믿는 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를 이 땅에 증거하고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과 도전들을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가 이 땅에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시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헤롯에 의해서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싸움을 걸어왔고 예수님의 평화를 빼앗고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싸우려는 대적들을 위하여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과 평화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나와 불화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있을 때에 평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영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셨고 이를 이루신 것과 같이, 이 땅을 평화롭게 하고 사람들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치열한 싸움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평화의 관계를 위해서 치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떨어지게 해서 사람들의 평화를 빼앗과 불안과 염려속에서 살게하는 악한 영의 도전에 대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평화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평화를 깨려고 하는 악한 도전을 향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검을 내려 놓고, 내 자신이 죽음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Pax Romana와 같은 거짓된 평화가 많고, 이를 이루려고 하는 거짓된 유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신 참 평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기는,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과 더욱 온전한 평화의 관계를 이루시고, 그 안에서 오는 하나님의 평화, 샬롬을 이룰 수 있고, 드러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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