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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시다가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지날 때에 수가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동네에는 야곱이 팠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우물가에서 머물러 계셨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에, 날이 뜨거워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서,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은 사마리안 사람들을 상종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와 갈릴리를 여행할 때에도 사마리아 땅을 피해서 멀리 돌아갔을 정도였습니다. 유대땅과 사마리아 땅은 서로가 넘지 않는 경계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곳은 부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조상들도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에, 정책적으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살면서 서로 결혼을 하게 되고, 그래서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신들을 받아들임으로 순수한 하나님 신앙도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보았고, 상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깊은 경계선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그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넘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그 당시에 있었던 경계선들을 무수하게 넘나 드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 경계선들을 하나씩 둘씩 지워가시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그어 놓은 경계선들을 넘어서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랬습니다. 경계선을 넘어 온 제자들, 선교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 땅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넘어오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구원에 이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경계선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예수님과 같이 굳이 넘어서야 하는 경계선들은 없는지를 한 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날 이 땅 가운데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국가의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강으로 나누어진 경계선들도 있고, 한국과 같이 철조망으로 나누어진 경계선도 있습니다. 주와 주사이에도 경계가 있고, 도시와 도시에도 경계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인상적으로 여겼던 것 중에 하나가 한국에 비해 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벽돌로 담을 쌓아서 밖에서 안이 들어다 보이지 않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보니 앞 마당은 훤히 뚫려 있고, 팬스를 세워 놓은 것도 허술해 보였습니다. 팬스 사이로 마당 안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팬스는 손을 잡고 흔들면 흔들거릴 정도로 약해 보였고, 단숨에 넘어갈 수 있을 만한 높이였습니다. 이런 팬스가 왜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살다가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허술한 담 사이로, 보이지 않는 더 높은 경계선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도에, 캔터키에 사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집 위에서 떠 다니는 드론(Drone)을 쏴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드론을 쏴서 떨어뜨린 이유는, 드론이 자신의 집 위에만 머물러서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드론이 떨어지자, 근처에서 드론을 조종하고 있던4명의 남자가 화가 나서, 드론을 떨어뜨린 남자의 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집주인은 그 남자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당신들이 만약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온다면, 이번에는 당신들을 쏴 버리겠다."고 경고를 했고, 그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차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신경을 써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들이 참 많이도 존재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정해 놓은 편견과 미움의 경계선을 넘어서 다니셨던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넘으셨던 경계선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바다의 풍랑을 뚫고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만나고자 하신 사람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무덤 사이에 지내고 있는 사람인데 밤낮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고랑과 쇠사슬로 매어 놓았어도 이를 끊기 때문에 그를 제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미친 사람들을 격리시키려고 했고,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계선을 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미친 사람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던 더러운 군대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들은 근처에 있는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되고, 그 돼지들은 바다로 빠져서 다 몰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인 지방에 가신 것은 그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귀신들린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경계선을 넘어서 그를 만나고 그를 고쳐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외에도 사람들이 경계선을 그어 놓고 넘지 말라고 했던 그 경계선을 많이도 넘어가셨습니다. 세리들에게로 넘어 가셨고, 간음한 여인에게도 넘어가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문둥병자나 장애인과 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불구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부정한 사람들에게 가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경계선을 넘어 다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 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는 일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사도행전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을 넘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모든 경계선을 넘어서, 세상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앞에 있는 경계선을 날마다 넘어서야만 합니다.

 

2. 그런데 이렇게 경계선을 넘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마리아로 가셔서 수가성에 있는 여인을 만나신 것도, 그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려 버림받은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갈릴리의 풍랑을 넘어서 미친 사람에게 온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죄로 인해 나누어진 그 경계선을 넘으신 사랑의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죄의 권세가운데 있던 이 땅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을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상상하게 됩니다.

 

캄보디아에서 선교하시는 한 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 부부는 캄보디아에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캄보디아의 장애인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시면서 휠체어나 필요한 물건들을 전해 주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처음 캄보디아 장애인 사역을 하실 때에, 아내 선교사님께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장애인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장애인들은 몸이 불편하다가 보니 제대로 씻지 못해 더러웠고, 그래서 병에 걸린 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들을 사랑으로 안아주려고 해도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참 속상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 사역을 꾸준히 했습니다. 그리고 삼년정도가 지나고 계속 그렇게 사역하다가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안아줄 수 있고 사랑스럽게 품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넘으신 경계선은 그 이상의 일입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리고 사람의 육신의 몸을 입고서 그 경계선을 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좋지 않은 지역으로 이사를 해도 속상해 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득실한 아주 더러운 지역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곳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깨끗한 몸에 조금이라도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는 것도 꺼려하는데, 예수님은 그 거룩하신 몸에 사람의 불편하고 죄로 오염당한 사람의 몸을 입고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된 경계선을 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경계선을 넘으시는데 선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정해 놓은 미움과 증오와 편견의 경계선들을 건너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과 같이 그 사랑을 가지고, 경계선을 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고 전달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으로 경계선을 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3. 이제 기독교인으로서 저와 여러분은 늘 주님께서 넘으신 그 경계선을 넘으셔야 하는 제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 경계선을 넘어 우리 주님께로도 가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 경계선을 넘어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환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오신 일은 정말로 환영할 기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기 보다는 망설여하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경계선을 넘어서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을 만났을 때에, 여인은 물을 달라는 주님을 향해서 반응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키우던 돼지들이 죽은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에게 와서 자신들의 마을을 떠나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된다고 여기니까 예수님을 환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게서 오셨을 때에, 때로 우리의 경계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시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손해볼 것 같다고 여깁니다. 내 재산이, 내 열정이 그로 인해서 손해를 볼 것 같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 중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적당하게 교회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성령받고, 은혜많이 받는 것도 원치 아니합니다. 만약에 은혜받아서 광신적으로 믿으면 어떻게 하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로 가지 못하는 시간의 경계선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은 좋은데, 경건의 생활을 하는 데는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내가 세워 놓은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온전하게 기도하고, 목소리 높여서 찬양하며 그분의 은혜로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넘어서고자 나의 부끄러움, 선입관들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너 왜 왔냐?”가 아니라, 손을 들어 안아주시며 환영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경계선을 넘어서 우리에게 오셨고, 구원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넘어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로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의 영역으로 넘어들어가야 하고, 그 은혜로 넘어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안에 가족안에서 넘기 힘든 경계선이 있습니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세대차가 나고, 이미 그 경계선이 굳어졌더라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 그러한 경계선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경계선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역사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열정과 사랑으로 넘어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못했던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저했던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넘어온 사랑에 대해서도 웰컴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에 요르단에서 국경을 넘어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을 친근하게 생각해 왔는데, 정작 처음 만난 국경을 지키는 유대인 군인들은 무서웠습니다. 총을 매고 상엄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경계선을 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반갑게 환영한다면 참 좋습니다.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주 경계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보는 싸인은 환영 싸인입니다. “Welcome to Texas”Welcome to Oklahoma…” 자신의 경계선을 넘어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니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Welcome to Me” 나에게로 넘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이 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역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의 영역안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하심의 영역으로 날마다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랑을 가지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내가 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넘어가는 것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고집, 생각, 가치관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맡기고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넘어가기가 가장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자신을 부인하면서 넘으셨고, 다른 신앙의 위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넘어서, 하나님께 가고, 사람들에게 갈 때에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경계선을 넘어서는 사람들입니다. 북한 땅에, 이슬람 땅에, 다른 이들은 경계선을 쌓고 벽을 쌓아 올리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이를 넘어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넘는 일은, 우리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땅끝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유다를 넘어야 사마리아도 가고 땅끝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세워 놓은 경계선을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안에 넘어야할 경계선이 있습니까? 사랑을 갖고 지속적으로 그 경계선을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러한 경계가 되는 대상이 있습니까? 그것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서기를 꺼리는 영역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선들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늘 그 경계선을 넘기에 먼저 자신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를 통하여서 경계선을 넘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증인의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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