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2013 - 복있는 성도 [시편 1:1-6]

by Rejoice posted Oct 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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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연합감리교회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긴밀한 유대관계입니다.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목회자와 평신도가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의 연회 참석자를 선출할 때에도, 목회자와 평신도의 수를 동일하게 해서 선출하고 함께 모여서 회의를 진행합니다.

특별히 우리교회는 평신도 주일을 성도의 주일로 지킵니다. 왜냐하면 성도라는 호칭은, "거룩한 무리, 백성"이라는 뜻으로서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사용 받는 거룩한 무리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무직분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도의 무리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성도로의 부르심이 없다면, 교회 안에 있는 어떠한 직분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로서 거룩한 무리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거룩한 믿음의 무리에 속했던 성도들은 장차, 하늘나라의 거룩한 천국시민으로 거룩한 성도의 무리에 속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호칭 만으로의 성도가 아니라, 실제로 성도는 무슨 뜻이고, 성도의 삶은 어떠한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 거룩한 자들의 모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쉬(Kodesh)'라는 단어인데, 이는 '잘라내다.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풍조와 문화에 동화되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동일화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하신 분, 곧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도 그 거룩하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1:45절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요청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두움에서 불러 내어 분리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의 풍습과 문화와 동화되어 살면서 거룩한 성도라고 불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거룩하지 못한 성품과 생각과 행동들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성도들이 행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이제 실제 거룩한 무리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복 있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도달한 자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거나 부자가 되었거나 세상에서 성공한 어떠한 결과를 보고서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세상의 악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성도와 복 있는 사람은 동일합니다. 세상의 죄악과 풍조로부터 자신을 구별한 성도들은 곧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까?

 

1. 먼저 악인의 꾀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구별해야 합니다.

악인이라고 하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율법적으로 그들의 죄가 입증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악인의 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일을 하도록 일을 꾸미며 악한 생각을 넣는 것입니다. 악인들과 함께 있으면 그러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함께 악한 꾀를 좇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합니다. “머리 위에 새가 지나다니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는 없지만, 당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머리에 스치는 악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스치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러한 악인의 꾀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내 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악한 자의 꾐이 있고, 그 생각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에 그것을 묵상하고 되새기고, 분노하고 하는 것은 구별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인의 꾀, 악한 생각이 나를 사로 잡을 때에 그것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악인의 꾀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인의 꾀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2. 죄인의 길에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죄인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가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걷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죄인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큰 문과 큰 길로 가는데 결국 멸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지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무엇이 영생의 길인지를 모르고, 세상 사람들을 걸어가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그러기에 그 길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은 유혹 속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그 길이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이 넓고 편하다고 해서 그 길을 걷는 다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넓고 편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잃어버리고 빗나간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들어가기 힘들고 걷기 힘들지만 그 길을 걸어 영생에 이르는 것이 성도여, 복 있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3.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오만하다.’는 뜻은, ‘조롱하다. 비웃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곧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라기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조롱하는 오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이 얼마나 성도들을 죄짓게 만드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다가 이제는 죄인의 길에 서다가, 결국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악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결국은 6절에 보니까망하리로다.’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망하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거룩함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된 모습도 있지만, 악인의 꾀도 있고, 죄인의 길에 서 있는 모습, 오만한 자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는 모습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내 모습의 악한 것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자기 몸이지만, 성도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손만이 아닙니다. 45절에는 발이 범죄케 하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그것을 찍어버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47절에는 눈이 범죄케 하거든 눈도 뽑아 버리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끔찍한 일이지만, 성도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범죄케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고, 자신을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분리와 구별을 통한 거룩을 이루는 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의 2010년 작품인 '127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2003년에 애런 랄스턴(Aron Ralston)이라는 청년에게 있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습니다. 평소 산악 하이킹을 즐기던 애런은 2003년 유타주 블루존 캐년을 하이킹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의 안내로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협곡 깊숙한 곳에 있는 호수에 가게 됩니다. 낯선 곳에서 그들과 헤어진 애런은 혼자 산행을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깊은 틈이 나있는 절벽 사이 위를 지나게 됩니다. 그 틈 사이에 끼어있는 바위를 밟고 지나가는데 그 바위가 절벽아래로 떨어지면서 그만 바위와 함께 절벽 틈 사이로 떨어지다가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비좁은 절벽 사이를 바위와 함께 떨어질 때에, 애런의 오른팔이 바위와 절벽 사이에 끼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애런은 오도가도 못하고 그곳에서 127시간, 닷새를 바위에 끼어있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산악용 로프, , 아주 약간의 물,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조요원이 올 수 없는 그곳에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캠코더와 카메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애런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팔을 자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칼로 자를 수 없는 자신의 팔의 뼈를 먼저 부러뜨리고, 무딘 칼로 자신의 살을 자르고, 힘줄을 자르고 핏줄을 자르면서 팔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떼어 냅니다. 분리합니다. 그래서 살아나게 됩니다.

실제로 앨런 랄스턴은 자신의 팔이 잘라 나간 후에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이고 아파죽겠네, 내 잘린 팔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 이제 이 몸으로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가나......" 가 아닙니다. "만세, 드디어 내 팔 잘랐다. 살았다..."고 환호를 지르며 미친 듯이 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았던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그 팔을 자를 수 있었기에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하고 더러운 생각에서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가는 행동과 삶의 방식에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삶에 주저앉고 싶은 욕망에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구별된 삶은 더욱 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서 성도된 삶으로 변화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는 구별되지만, 거룩함과는 가까워 져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거룩하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입니다. 날마다 교회를 가까이 할 때에 우리 가운데 거룩함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통하여서 거룩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몸 된 지체인 성도들 간의 모임에 참석하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서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성도의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의 말씀의 거룩함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성별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그래서 나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지킬 때의 주님의 사랑을 받는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성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도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저절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고 분리시킴으로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악인의 꾀로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죄인에 길에서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악인의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죄인의 넓은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와 성도의 모임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전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가운데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도, 거룩한 무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존귀하게 여기며, 성도로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날마다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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