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0/2013 - 고난 중에 기다리는 영광 [로마서 8:18-25]
어느
신발회사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두 명의 영업사원을 아프리카에 있는 두 나라로 각각 파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
도착했지만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사원은 실망하여 회사에 보고를 합니다. “이곳은 신발을 전혀 신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신발을 팔만한 곳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시장성 제로입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다른 나라에 파견된
사원도 회사에 보고를 했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신발을 전혀 신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신발을 팔면 신발을 살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시장성 완전 대박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가까운 것만을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에, 먼 미래의 일들까지도 바라보는
원시안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미성숙한 사람들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가까운 것만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어렵고 힘든 일들은
피해고, 쉽고 재미있는 일들을 찾아서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게
마련입니다. "그 때는 좀 재미없었어도 열심히 공부를 해 두었어야 하는 건데… 그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좀 힘들더라도 그 때 좀 참고 했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장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견딥니다. 현재의 고난을 이겨야만 보다 가치있는 미래의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만사형통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18절에, 현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은 다름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난은, 내가 세상적으로 잘 되고 성공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러한 고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고난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않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은 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되는 장차의 영광은 그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 교회에 다니기 위해 희생하고 손해보고,
고난을 감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습니다. 앞으로 있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위해서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을 장차의 영광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사람들만이 아니라 피조물들도 현재의 고난을 참으며 앞으로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들도
고난이 있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들도 장차의 영광을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19절에 보니까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 가운데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데서 해방되어서 제대로 쓰임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에 의해서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어 썩어질 세상의
사람들로 인해서 종노릇하며 사용되어지는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다고
22절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 창조물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치를 따라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들로
인해서 그 가치에 합당하지 않은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1절에 보면,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르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에서 나오는 광채는 숭배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조물인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탄식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수
많은 보석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보석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마치 우상을 섬기듯 보석들을 다루며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피조물인 돌들이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탄식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 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 나무를 베어다가 커다란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하며 복을 달라고 하면 그 나무들이 "오냐, 고맙다."라고 좋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인도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도 숭배의 대상입니다. 길거리에 코끼리가 지나가고 소가 엎드려 있고,
쥐와 개들이 지나다녀도 그것을 성스럽게 생각하여서 그냥 내버려 둡니다. 사람들이
도리어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동물들이 자신들을 숭배해 주어서 고맙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탄식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로 인해서 오용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썩어짐의 종 노릇한다며 탄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만드는 일들로 인해서 피조물들도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만물들은 그들을 제대로 다스리고 통치할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어진 그 목적에 맡게끔 사용되어 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기다리며 피조물들은 고통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출현은 피조물이 탄식하며 기다렸던 존재인 것입니다. 피조물의 가치를 제대로 회복시켜줄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2.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현재의 고난을 의미하지만,
이와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음을 바라볼 수 있기에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피조물들이
자신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에 대해서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이 땅의 성도들도 탄식하며 고난 중에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23절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들, 곧 성도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입니다. 그 열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그 첫 열매를 받아 성도들은 구원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대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구원과 동시에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그 고난 뒤에 임할 영광이 있음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위하여서 당하는 고난을 도리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이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되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형편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왔습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려야 하겠기에 기독교인들은 로마근처에 있는 카타콤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원래 카타콤은 시체를 매장할 목적으로 파놓은 굴입니다.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도시 경계 내에는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도시 밖에 카타콤을 만들어서 시체를 매장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박해가 있게 되자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그
땅 굴 속에 산 사람들이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그 고난은 장차 있을 영광을 준비하는 의식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치르는 고난도 있고, 불편함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슬람과 공산권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반드시 따릅니다. 제대로 직장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듭니다. 언제 폭행을 당하고, 심하면 죽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가족들 조차도 자신을 핍박하고 쫓아냅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고된 고난을 통과해야지 하나님의 영광에 이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할 때에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장차 있을 영광의 근거가 됩니다.
상급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 손해가 오는 일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과 억울함들이 있습니까? 도리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영광이 이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다는 게 힘이 듭니까?
기뻐하십시오.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더 큰 상이 있으며 복이
있으며, 현재의 고난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런데 장차 올 영광에 관한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4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 소망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뭐 유익되는
것이 있습니까? 카타콤을
파고들어가 죽은 시체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굶주린 사자가 있는 원형 경기장에 던져지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직업도 제대로 구할 수 없으니 그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진정한 소망은 눈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으로 장차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고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소망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눈과 머리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몸의 부활을 본 사람이
없고, 천국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차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믿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25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가 구원받기 위해서 120여년간 방주를 지으면서 기다렸습니다. 120여년의 기간은 참으로 고통스러웠겠지만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가 믿지 못했으면, 인내하지 못했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믿었다고 해도 그 믿음과 소망이 강하지 않았다고 하면 120년간 방주를 짓는
도중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과 구원의 사건을 믿고 소망했기 때문에 인내하고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사서하는 고난과 어려움들은 어떠한 것입니까? 손해보는 일들이 있습니까?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들이 있습니까? 억울해
하지 마시고 기뻐하십니다. 그 일들을 통과하는 자들에게는 장차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고난과 영광은
별개가 아닙니다. 고난 뒤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Combination 입니다. 로마서 8:17절에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 받는 자들입니다. 최고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임하셔서 영광된 보좌에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영광에 이른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인은
근시안적인 사고의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되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세의 고난을 피해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현세의 고난을 통하여서 하늘의 영광에 이름을 믿고
소망하며, 그 고난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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