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분들이 '생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시험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곧 천하 만국을 네게 주리라" 천하를 다 주겠다고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한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목숨이 있어야 온 천하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온 천하와 목숨은 바꿀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그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바꿀 만 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에,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그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정말로 귀하게 여겨지는 순간은,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곧 사명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참 무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사명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삶의 의미와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 모든 사람에게 부르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마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같이 생명을 다해 한 해를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있는 장로들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세 차례에 걸쳐서 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교를 거의 다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에,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도록 청하였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는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먼 곳입니다. 사울은 전에 그곳에서 3년 정도 사역을 하였고 이때 에베소교회가
세워지고, 지도자인 장로들이 교회의 영적, 행정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초청에 응해서 밀레도에 와서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가지 않고, 굳이 초청해서 밀레도에서 만난 것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입니다. 에베소까지 갔다가 오면
시간이 지체되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늦어지기에 장로들을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급하게 가고자 하는 것은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22절에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고, 오직 성령님이 각 성에서 사도바울에게 증거하기를,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굳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사명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국민교육헌장을 많이 낭독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입니다. 이와 같이 나라로부터 주어진 사명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맡겨진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자신이 스스로 부가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명을 바칠 궁극적인 사명은 국가가 주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스스로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쓰시겠다고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사명입니다. 24절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면서 마치고자 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명이기에 귀했고,
목숨까지도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명을 받기 전에, 바울도 나름대로 사명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좇는 기독교인들은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에서 온 것이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지만,
신념은 자신으로부터 옵니다. 성도가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은 신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사명도 사도바울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거닐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다면,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우리 가정과 속해져 있는 공동체에서 사도바울이
받았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그 사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겸손과 눈물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스스로 세운 종교적인 신념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교회를 핍박하고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사람들을 죽이고 해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에는 그 자세가 아주 달라집니다. 1) 먼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은 겸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귀하지만, 그 귀한 사명을 할 때에 겸손한 자세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그러한 귀한 사명을 깨달았지만, 그러한 일들을 감당할 때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겸손으로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낮추었으면 모든... 겸손이라고 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겸손이라는 표현을 쓸 때에 그 당시에 겸손은 아름다운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노예가 그 주인에게 가지는 낮은 자세를 말합니다.
자신이 모든 겸손으로 사명을 감당했다고 했을 때에는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맹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포기하고 없는 것과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명을 위해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 앞에 죽이고 종이 되어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2)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은 눈물로 하는 것입니다. 사명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곳에는 늘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시험을 당할 때도 눈물을 흘리며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해를 입혔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자신을 죽이면서 하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을 죽이고 겸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을 당해도 분노와 앙갚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인내하면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3. 사명을 받은 자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사명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정확한 사명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살아서는 다른 이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죽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죽는 사명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사도바울의 모습도 예수님과 같이 사명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의
몸을 윤택하기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른 이들을 핍박하고 해를 입히는 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이 다 내어주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겸손과 눈물로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그 목적, 사명을 가지고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교회 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님께서 부르신 목적, 사역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명을 피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22절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곧 고난의 자리지만, 그곳이 사도바울의 사명지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을 마치기까지 은혜와 능력으로 도와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과 사명지들이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사명과 사명지들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명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가지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에게 주신 사명지가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때로는 피하고 싶은 상황, 가정, 직장 때로는 교회, 이사회와 이 나라 등에 일어나는
일들이 있지만, 이곳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지이고 감당해야 할 주님께서 주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올
해, 사명을 감당할 때에, 사도바울과 같이, 이 사명을 마치기에는
나의 생명이 조금도 아깝지 않구나 라는 사명자의 고백과 보람과 감사와 저와 여러분들의 사역가운데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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