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2014 -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3]
지난 주일에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한번은 육신의 몸으로 태어나서 세상을 보지만, 두번째
영적인 태어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통해서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과제는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인 삶을 잘 돌아보지 못하게 되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도 영적인 미숙함 때문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교인들도 많아지고 교회건물도 커지고 성장한 것 같은데, 영적인 실체는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육의 삶에 얽매여서 영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 거듭난 사람이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라보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전에는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면, 이제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내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내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는
것을 학습하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고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사람을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성장해서 이웃들과 사회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을 보면서 닮아갑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유치원생 딸이 있는
젊은 부부의 가정이었습니다. 심방 예배를 잘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얌전하게 예배를 잘 드린 딸아이가 기특해서 물 잔에다가 물을 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물컵을 받아 들고 목사님께 하는 말이 “목사님, 건배”그리고 물을 마신 후에 “캬! 조타, 술술 넘어간다.” 하더랍니다.
세상에 볼 것이 많고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육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문화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적으로는 부할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 된 삶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죄의 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입니다.
2.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특별히 영어 성경에서는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을 시키자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기에 다른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의 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죄인
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율법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던지, 아니면 그 여인을 살려주라고 하고 자신도 율법을 어긴 사람으로 그 여인과 함께 돌에 맞던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로 사람을 쳐 죽인다는 것이 상상이나 됩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어길 수도 없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제서야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은 물론이고, 간음한 여인의 죄를 집행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 자신들도
죄목만 달랐지 간음한 여인과 똑같은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지만 어느 한 사람도 그 여인을 먼저 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 중에 먼저
칠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주변을 보지만 어느 누구도 죄 없다고 먼저 돌로 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따르며 경건의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가르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먼저 돌로 칠 수 없는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선하고 경건해도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 여인을 칠 수 있는 죄가 없으신 가장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똑 같은 몸을 입고 계시지만 죄는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돌로 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선하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세상의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삶을 동향하고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주되신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을 바라볼 때인 줄로 믿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면서 사랑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에도 사람을 바라보면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모습 속에서 악한 모습을 볼 때에 실망하고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는 우리의 죄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갚을 치르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죄의 문제에 빠져 있을 때에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고난과 환란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지만 그 믿음이 늘 견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어떨 때는 믿음이 강하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떨어져서 그 믿음을 지키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가기에 너무 연약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에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고난과 환란의 길을 다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점심 식사를 마치고
20여명의 성도님들과 함께 “Son of God”라는 성극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할 수 없는 수
많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영화로 담아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장면을 보시면서 영화관 안의 여러분들이
흐느끼시며 우셨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고난과 환란은 사람이 당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장차 있을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시험 속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 고난을 다한 후에 영광 중에 계시는 자신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5:3-4절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삶의 고난과 문제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닥친 문제가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과 환란은 필수입니다. 고난과 환란은 문제 너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고난 뒤에 있는 소망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시험을 이기며,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인터넷 포르노
중독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에 죄책감이 있지만 날마다 인터넷에 있는 벌거벗은 여자들의 모습에 눈을
고정시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청년이 한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과는 다른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습니다. 이
사실이 이 청년을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자신과 같이 더럽고 음란한 사람이 순결한 여인을 만나는 것이
죄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목사님께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인터넷 포르노 중독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끊어야 된다고 의식할수록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끊는 것을 실패하고 또 다른 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
분은 그것을 끊으려고 하는 것보다, 그 아가씨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아가씨를 위해 편지를 쓰고, 돈을 모아 꽃다발과 선물을 사주고, 노래를 만들어 연주도 해주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났습니다. 그 청년은 더 이상
중독에 빠져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청년의 시선은 아가씨에게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바라봄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육신의
만족을 바라보고 세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그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을 닮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성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에 바라볼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죄에서부터
건져내며, 믿음을 끝까지 지켜 구원에 이르게 할만한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 믿음의 길을 온전케 하시는 분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사야 45: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그분을 바라볼 때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과 시험 가운데 있던지 간에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그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그 시험을 이기게 되고 온전한 믿음을 이루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볼 때에 인생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코치해 주시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여정을 갖기를 원합니다. 거듭난
삶을 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의 육의 삶을 자꾸만 보면 동경하게 되고 닮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온전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경청하심으로 희미하게 들렸던 주님의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늘 예수님을 생각하며 바라봄으로 희미하게 보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빼앗겼던 마음이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영적 반전이 있는 사순절 기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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