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3/2014 - 임금님의 용서 [마태복음 18:21-35]

by Rejoice posted Apr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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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 바닥에 깔고, 길가에 서 있는 종려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였습니다. ‘호산나라는 것은,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아람어 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은 또한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환영 받으셨지만, 결국은 그 사람들로 인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지만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지 못하기에 그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한 도덕적인 행동이나 좋은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천국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음으로 천국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서로를 용서를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에 궁금한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하긴 하는데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 똑같은 일로 와서 계속 용서를 구한다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사람들은 뭘 하면  삼세번이라고 하지요. 세 번 정도면 무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유대 랍비들도 세번까지는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한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정도 용서해 주면 충분하다고 베드로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490번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에 관계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때로 랍비나 베드로와 같이 용서의 횟수를 관심하며 용서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만큼 용서하고 참았으니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용서입니다. 용서하라고 했으니까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용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와 관계없이, 내가 몇 번을 용서해 주었는지 상관도 하지 않는 그러한 용서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용서를 통하여서 이 땅 가운데 천국이 임했고, 그것이 확장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용서함과 천국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1. 먼저 하나님은 죄인 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함께 회계하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음을 보고서 그를 잡아 옵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렇다면 육천일, 연수로 따지만 16년 이상을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한 달란트가 됩니다. 한 달란트를 모으기도 힘이 든데 일만달란트를 빚졌다고 했으니 상상이 안 되는 금액입니다. 그 많은 돈을 빚진 것도 용한 일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사람이 임금이신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 도저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하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죄의 빚을 갚을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임금은 그 빚진 사람에게 불호령을 내립니다.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라명령을 합니다.  그 명령을 들은 빚진 사람은 어떻게 할 방법은 없고, 임금께 엎드리어 절하며 간절히 애원합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겠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처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빚 진자의 모습을 본 임금은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빚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치러야만 하는 그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 때의 고통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가족을 팔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고 심지어 자신까지 팔아서 갚으려고 할지라도 갚지 못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동안 일만달란트를 빚지고 그 빚에 눌려서 염려하며 고통스럽게 살았을 시간들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이러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갚을 형편이 못되어 그것에 눌려서 염려하며 걱정하던 그 시간들 말입니다. 은행에 빚지고, 사채로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지는 못하고 이자만 늘어 난다면 그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낙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빚을 받아야 할 사람이 빚진 자의 형편을 불쌍히 보고서 빚을 다 탕감했으니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그 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만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하게 본 임금이, 갑자기 그가 빚진 모든 것을 탕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다름아닌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보아 주셔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의 빚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을 받아 기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심으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아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천국도 없는 것입니다.

 

2.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음으로 천국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함을 받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이들을 용서함으로 우리 가운데 천국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일만달란트 받은 사람이 용서함을 받고서 누리는 것은 천국입니다. 빚졌을 때에는 임금님이 두려웠습니다. 임금 앞에 가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탕감을 받은 후로 임금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너무 기쁘고 감사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와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빚진 사람을 만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던 사람이 임금에게 탕감을 받고 나오다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동관을 만납니다. 동관이라는 것은 같이 일하는 동료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동료를 보자마자 붙들고 목을 잡고서 하는 말이 '빚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 동료가 빚진 것은 일백데나리온 입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엎드려서 간구합니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합니다.  그런데 그 일만달란트 빚졌던 사람은 그것을 참거나 용서하지 않고 대신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일 백데나리온 이라고 한다면 백일정도 일을 해서 갚을 수 있는 크지 않은 돈입니다. 자신이 탕감 받은 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보 잘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금액입니다. 굳이 감옥에까지 집어 넣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합니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를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라는 것입니다.

임금은 자신이 용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천국이 더욱 확장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탕감받고 용서함을 받았는지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백데리온 빚진 자가 엎드려서 간구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신도 똑같이 임금 앞에서 엎드려 간구했던 그 때의 불쌍한 자신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 동료가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라고 애절하게 부탁했을 때에, 자신도 임금에게나를 참아 주소서, 다 갚으리라하였던 자신의 절박했던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었던 그래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신 임금님, 우리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던 것입니다.

용서함을 받은 자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못할 때에 그 천국이 빼앗깁니다. 임금은 다시 그 사람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33절에,  "네가 어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에 가둡니다. 그가 그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다시 임금이 불쌍하게 그를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구히 그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다른 이를 용서하고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주신 천국의 기쁨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용서는 그 값을 치를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와 같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없이 어떻게 우리가 천국을 누리며,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큰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작은 것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으로 인해서 나에게 주신 천국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커다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보다 훨씬 더 값진 갚을 치르셨습니다.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고난의 길을 걷다가 결국 십자가에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용서도 없었을 것이고,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그 값을 자신이 치를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의 희생을 통하여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을 각오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손해 일 수도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같은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가를 각오할 때에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용서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용서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용납하고 스스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함이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 잘못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불쌍히 여김으로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희들이 하는 죄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할 때에 그를 용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이 죄인 것을 알고 그러기에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우리가 죄를 깨닫고 와서 용서를 구했을 때에 가 아니라,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세계의 수도'(The Capital of the World)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에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 수도록 더욱 악화되었고, 마침내 아들은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서 마드리드로 갔습니다. 뒤늦게 아버지는 아들과 화해하기로 결심을 하고, 마드리드에 있는 신문사에 다음 과 같은 광고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 그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약속한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아버지의 용서를 기다리던 아들들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해서 천국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했던 가정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서 상처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웃을 용납하지 못해서 불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나라끼리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테러를 하고 전쟁을 일으켜서 스스로 천국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천국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라는 것을 통하여서 이 땅 가운데 세워지고 확장되어 집니다.  서로의 허물과 연약함을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우리 가운데 화해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14절에누가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하였습니다.

우리의 용서와 용납이 하나님의 나를 세웁니다. 나에게 범죄한 이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모습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확장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용서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용서해야 할 일도 있지만, 용서받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한 주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깝게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 있는 귀한 고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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