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성가운데에는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구속을 받거나, 환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무엇을 해야 하며 살아간다면
이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할 때에 힘든 일을 하더라도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합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의 지도자인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유의 나라로 상징되는 미국도, 영국에 의해서 156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모든 인간은 아무도 박탈할 수 없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믿는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자유를 주장합니다. 첫째는 "기아에서의 자유"
입니다. 먹을 걱정이 없을 때에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질병에서의 자유" 로 건강하게
살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 입니다. 넷째로 "정치적 억압에서의 자유"입니다. 루즈벨트는 사람을
자유케 못하는 것으로 굶주림, 질병, 전쟁과 자연재해,
정치적 억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해결되면 사람이 정말로 자유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는데 무척 관심이 있으십니다.
13절에는 갈리다아교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신 이유가 “자유를 위하여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1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관심하시는 자유는,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에게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주어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죄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얽매인 삶은 영영 형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무엇이며, 그러한 자유함속에서 사는 것은 어떠한 삶인지를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함을 가지고 도리어 죄의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에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박의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에 나쁜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담배와 술과 마약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망의 노예, 미움의 노예, 성적 쾌락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박을 할 수 있고, 마약을 할 수 있고,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자유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자유함을 가지고 도리어,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더욱 죄의 노예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자유의 대가는 결국 영적인 죽음,
사망인 것입니다. 자유하면 자유할 수도록 죄를 짓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그러한 자유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진정한 자유를 아셨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자유라기 보다는, 죄로부터의 자유, 영적인 해방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게 되면,
그것은 곧 더 죄짓게 만드는 일들만 하게 되지만,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에게 그 자유함을
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사업에 힘쓰며, 천국의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율법 아래에서 정죄당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갈라디아교회에서 사도 바울을 근심케 하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율법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지역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이후 율법을 따르는
유대주의자들이 그를 박해함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려오는 소문을 들어보니 갈라디아교인들
중에 육체의 할례와 행함에 노예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하였는데, 갈라디아교인들 중에는 율법적인
행위를 자랑하고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으로 선한 행위를 살아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단 한번의 영원한 속죄제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육체의 공로를 따라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들이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으로나 선행으로나 대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유케 되며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죄로부터의 자유케 하셨으며,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아야 하는 억압에서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참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폴
마이어가 쓴 '코끼리 훈련법' 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인 후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무거운 물건을 코로 들어 옮기기도 하고, 조그마한 기둥 위에 올라가 앞 발 들고 서서 조련사가 지시하는 대로 묘기를 부립니다. 이렇게
코끼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코끼리가 어릴 때에 코끼리를 말뚝에 단단한
밧줄로 묶어 놓습니다.어린 코끼리는 그 말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끼리의 머리 속에 "나는 말뚝에 매인 줄 때문에 꼼짝 못한다. 아무리 몸부림 쳐보아야 소용이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 후 코끼리가 커가면서 조련사는 계속해서 말뚝을 작게 하고
밧줄을 가늘게 합니다. 나중에는 성냥개비 만한 말뚝에 실오라기 같은 줄로 바꾸어 놓아도 코끼리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자신의 코로 1톤 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쉽게 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얌전하게 조련사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이
코끼리를 자유케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커스단의 코끼리와 같이 거짓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사람들을 자유케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용하셨던 중요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무기입니다. 사탄이 시험을 하면 예수께서는 "기록 된 바"
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하셨습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나를 죄로 억압하는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며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짓된 정보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학작품이나 도덕서적 정도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고리타분하거나 답답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진리가 아닌 것을 따라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사람을 자유케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미국의
회중교회 목사이며 신학자인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가 가장 자유 합니다. 그러나 같은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아주 부자유하게 됩니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인간 자신에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에 자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두어져 있는 가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기차는 철도 위를 달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다든가.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차는 철도 위에 있어야만
자유하고, 배는 물위에 있을 때에만 자유합니다. 새는 공중에서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심령은 어디에 있어야만 진정 자유할까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전적인 신뢰를 두고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전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홉킨스의 말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곧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을 때에 최고로
자유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아가니까 방황하게 되고 부자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진정한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때에 누려질 수 있습니다. 13절에, 자유를 위하여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자유함은,
육적인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자유케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구의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종노릇은 어쩔 수 없이 하는 억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유와 기쁨의 행위입니다.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모든
율법은 내가 아닌,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그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당시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어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을 부리는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요구만 하는 사람입니까?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케 된 자들이 당연히 해야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종노릇이라고 말합니다. 종노릇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강제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모가 자녀들은 양육할 때에 그 일은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수고스러운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종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죄인된 사람들을 사랑하시니까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 종노릇해도
그 안에서 자유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종노릇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사랑으로 섬기는 이들은 그것을 종노릇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부르심의 사명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여깁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13절과 15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으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 물고 먹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함을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반대로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으로 서로 물고 먹는다면 그것은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일입니다. 피차 망하는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죄의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시고자 불러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은, 그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물고 먹으며, 죄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더욱 사랑하고 섬기라고 그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기쁨을 주시려고 그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유롭게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억압해야 하지만,
섬기는 것은 내가 자원함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으로 더욱 많은 이들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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