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짧지만, 기독교인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하고 행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말합니다. 황금과 같이 아주 소중한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와 관련된
관계들을 제대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가 제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별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대로 살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요,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관계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제대로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돈이 있고, 건강이 있고, 사회적으로
잘 나간다고 하더라도,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잠언 17: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속에 있는 가족 간에도, 관계가 좋으면 마른 떡 한 조각을 나누어 먹는 것이 행복한데, 그렇지
못하면 서로 고기반찬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못된 관계로 인해서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관계를 통해서 기쁨이 누려지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오늘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관계를 원하시는지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나를 나이스하게 대해주고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나이스하게 대해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에게 못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좋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은,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잘 대접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돌아보게 해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나를 제발 막대해 주세요, 욕하고 때리고 나를 무시해도 좋습니다.”라고 하실 분은 없으실 겁니다.
프랑스 니스의 한 카페에 가면 다음과 같은 커피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메뉴를 보면, UN CAFÉ (앙 카페)는 7유로, 거의 10달러 이고요, UN CAFÉ, S’IL VOUS PLAIT (앙
카페 씰브 블래)는 4.25유로, 거의 6달러, 그리고 BONJOUR, UN CAFÉ, SIL VOUS PLAIT (앙 가페, 씰브
블래)는 1.40유로로 2달러가
안됩니다. 그러니까 가장 싼 커피는 2달러, 가장 비싼 카페는 10달러니까 거의 다섯 배의 가격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10달러커피나 2달러커피는
뭔가 다른 커피가 아니라, 정확히 똑 같은 커피라고 합니다. 단지
어떻게 주문하느냐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받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주문하는 사람이 “UN CAFÉ”, “커피한잔”이렇게 주문하면 10달러, “UN
CAFÉ, SIL VOUS PLAIT” “커피 한잔 주세요”라고 주문하면 6달러 정도, 그런데“BONJUOR,
UN CAFÉ, SIL VOUS PLAIT”는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 하면 2달러
정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 카페 주인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점심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오전 내내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 온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에 종종 카페 점원들에게 무례하게 대할 때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점원들에게 무례하게 하지 않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느끼면 마음이 상하고 그 사람을 잘 대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집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관계를 세계 사람들이 관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에 미사일이 오고 가더니, 극기야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틴 땅을 들어간 것입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3명의
청소년이 납치되어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한 것이 시발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녀가 그렇게
끔찍하게 대접받고 죽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 아이들을 납치해 죽인 사람도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한 취급을 받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취급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서로에게 미사일을 쏘아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자신들이 상대 국가로부터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상대방에게 준 상처와 피해는 정당하고,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그 나라의 관계가 제대로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때로는 그렇게 하십니다.
사무엘상 2:30절에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아갈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사람들간에도 이러한 법칙이 일반적으로 적용이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을 잘 대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2. 그런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형편을 알 수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알 때에 제대로 대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불교의 무학대사를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무학대사가 내심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에, 숭유억불정책을 폈기 때문입니다. 곧 고려시대에 장려되었던 불교에 대해서는 억압을 하고, 유교를 장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계의 거물인 무학대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편치도 않았습니다. 그런 이성계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오늘
보니 대사님의 모습이 꼭 돼지와 같이 보입니다.” 이 말을 하고 이성계가 그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무 반응이 없자 이성계가 다시 묻습니다. “그래, 대사는 내가 무엇처럼 보입니까?” 물었더니, 무학대사는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성계가 의아해서 “나는 대사를 돼지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어째서 대사는 나를 부처처럼 보인다고 합니까?”라고
물으니, 무학대사 하는 말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다른 사람을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내 입장에서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무엇을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부만큼 가까운 관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몸을 가진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십니까? “당신은 나를 정말 나를 몰라”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에게 가장 많이 듣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오랫동안 한
이불을 쓰면서 살았어도 잘 모르게 부부 아닙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당신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라고 불평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상대방을 알지 못하고서는 상대방을 잘 대접할 수가 없고, 좋은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내가 대접해야 할 사람을 연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알아야 상대방을 잘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과 꽃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를 알면 그 만큼 상대방을 잘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지쳐서 집에 들어오는
배우자에게 어떤 말과 행동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줄까를 관심하며 연구해야 합니다. 마당에서 잔디를
깎으며 땀을 흘리는 남편에게 시원한 얼음물이 얼마나 큰 격려와 응원이 되는 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수고하는 아내에게, “사랑해, 당신 때문에 행복해”라는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을 어떻게 잘 대접할 수 있을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교회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의 관계를 주셨는데, 그
관계를 선한 관계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애정을 가지고 관심하며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 힘들 때에, 우리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선하게 대접하시고 섬기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죄인된 사람들을 죄인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존귀하게
여겨주셔서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죄인된 사람들을 푸대접하지 않으시고 잘 대접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좋은 대접을 돌려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푸대접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이셔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최고의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상대방을 선하게 대접하는데, 상대방으로부터
푸대접을 받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을 선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시고, 사람들이 해 줄 수 없는 최고의 것으로 우리를 대접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제자를 향한 덕담이나 생활의 지혜 정도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꼭 지켜야 할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성도가 다른 이들을 대접하며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며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대접하는 것은 상대방인데, 상대방이 나를 잘 대접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선대하는 일을 먼저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분들은,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자 허락하신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형편을
아시고 후하게 대접하셨던 것과 같이, 남들을 형편을 이해하고 귀중하게 여기며 대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먼저 대접하시고, 교회에서도 먼저 대접하시고, 이웃과 동료들을 먼저 잘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에게 관계된 모든
관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경험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