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4/2014 - 말하는 발람의 나귀 [민수기 22:21-35]
이민 생활을 하다가 보면 정말 답답한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말이 통하지 않을 때입니다.단순한 의사는 손과 발을 동원해서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에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와서 한창 영어를 배울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우유를 사러 식품점에 들렀습니다. 처음 가는 곳이라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도
했고, 이 참에 영어 실습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유가 어디에 있는지 점원에게 물어봐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면서 미국 사람들은 우유를 말할 때에‘밀크’라고 하지 않고,
‘-크’발음은 잘 안하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서 있는 점원에게 물었습니다. “I am looking for
mil. Where is mil?” 그런데 그 점원이 이상한 눈치로 주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어떤 사람에게로 데려가길래, 또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I
am mil”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명찰을 보니까 정말로 “Mil”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말이 안 통해서 정말로 답답해
하던 동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 동물이 답답해 했으면 하나님께서 그 짐승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셔서 사람에게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태우고 가던 나귀가, 자신의 주인이 하는 일이 너무 답답해하니까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귀가 그 주인이 한 행동에 대해서 꾸중을 합니다.
그 주인은 자신이 부리는 동물에게 꾸중을 들을 정도로 답답하고 무지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 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나귀에게 꾸중을 들을 정도로 자신이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을 발람과 같이
가면서도, 이의 심각함을 알지 못하고 고집하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 발람 선지자를 통하여서 우리가 이러한 답답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한번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200만이나 되는 거대한 무리들이 가나안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대적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패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모압왕 발락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땅,
모압 땅을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압왕 발락은 나라의 장로들을 모아 비상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발람은 꽤 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느끼는 모압과 미디안 나라의 장로, 곧 귀족들이 함께 발람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복술의 예물도 두둑이 가져 갔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복비’입니다. 장로들은 발람을 만난 후 자신들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에 발람은 대답하기를, “그러한
결정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 선지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발람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고, 그들을 따라가지도 말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두 나라의 장로들을 그냥 돌려 보냅니다. 그런데, 발락왕이 그냥 온 귀족 장로들을
보고서 다시 사람들을 발람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이번에는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리고 그전보다 많은 예물을 보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또 말하기를 발람이 자기한테로 와서 이스라엘만 저주하면, 발람을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발람이 말하는 모든 것을 왕이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발람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하기에는 아까운 조건이었습니다. 발람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은금을 가득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라고 했는데 발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자신의 나귀에 안장을 얹고서 모압의 귀족들을 따라 발락왕을
만나러 출발한 것입니다. 1. 이러한 발람의 행동이 답답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들을 하도록 허락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은 일이라면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람을 향한 마음은, 발람이 발락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로 가지도 않고, 저주하지도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발람은 두번째 귀족들이 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왕이 자신을 존귀하게 대해주겠다는
말에 다시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지 여쭙고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모압왕이 제시한 물질과 명예가
없었다면, 발람 선지자는 그들을 따라 나설 어떠한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여쭐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싶은 마음에 사로 잡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마음을 잘 알셨습니다. 그래서 가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도록 허락은 하셨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발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 신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으니까 이제 모압왕이 제시한 예물과 명예의 절반은 자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날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발락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그렇게
행하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가 가는 길에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그 길을 지나갈 때에 발람을 쳐서 죽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가도된다고 허락을 하셨지만, 발람의 행동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시는 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자 할 때에 그 사람들의 의지를 꺾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으십니다. 발람이 모압의 귀족들을 따라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때에, 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려서 저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기회를 주신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허락하셨다고 우리는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강력하게 꺾으시며 하나님의 주장을 관철시키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하기 일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하고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결단하고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2. 하나님 보실 때에 또 답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은 닫혀 있고, 육적인 감각만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답답해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주고, 말씀을 해 주셔서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발람의 나귀가 주인에게 답답해 했던 것은, 자신이 보고 있는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를 발람은 보지 못하고 계속 자신을 채찍질한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귀족들을 따라 발락왕을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의 마음 속의 악함을 아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가는 길에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칼을 빼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동물인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나귀는 칼을 빼들고 섰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 그 길로 가지 못하고, 길 옆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은 자신의 나귀가 갑자기 밭으로 들어가니까 채찍질을 하며
다시 길로 올라오도록 했습니다. 나귀가 길에 올라와 보니 더욱 난감했습니다. 길은 포도원 사이로 나있었는데, 좁고 좌우에 담이 있었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서 지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길 옆의 담에 바짝 붙여서 그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귀를 타고 있던 발람 선지자의 발이 담과 나귀의 몸 사이에서 비비어
상하게 되었습니다. 발람도 당황했습니다. 지나가기 넉넉한 가운데 길을
제쳐놓고, 굳이 담에 붙어서 가는 나귀가 못마땅해서 제대로 가도록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일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좁은 곳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나귀로서 어떻게 빠져 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귀는 발람의 밑에 엎드려 버립니다. 곧 여호와의 사자 앞에 주저 앉아 버린
것입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발람 선지자는 나귀가 하는 일이 화가 나서 지팡이를 들어서
나귀를 때리기만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십니다. 나귀가 주인 발람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 같이 세번이나 때리느뇨?” 발람이 말합니다. “나를 거역한 연고니 내게 칼이 있었으면 너를 곧 죽였으리라” 합니다.
나귀가 댓구를 합니다. “네가 나를 평생동안 타왔는데,
그 동안 이렇게 행했던 일이 있었느냐?” 했더니 , 발람이 그러한 일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봅니다. 발람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나귀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가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발람은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나는 돌아가겠습니다.”자신의 범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귀가 볼 때에 발람이 하는 일은 정말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죽을 길인데 그 길을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눈이 닫혀 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길을 두려움 없이 재촉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냐면 영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발람 선지자가 용한 선지자였는지 모르지만, 이미 그의 영적인 눈은 재물로 인해서 닫혀 버렸습니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영적인 눈이 어둡게 되었고, 제대로 하나님의 뜻도 분별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사자도 지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물질과 명예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일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그 칼에 죽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삶은, 육적인 눈은 떠 있어서 세상의
것은 마음껏 보면서 욕심을 내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적인 세계를 보며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적인 감각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영적인 일들을 감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 선지자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22:12절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사람들이 별 볼일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복 주신 것입니다.
그들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압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발람에게 경고하기를 그들을 따라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자를 저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도리어 그것이 저주받을 일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축복 받을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우리를 저주할 만한 존재는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정죄하고 저주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저주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에 저주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억눌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임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성도들은
다른 이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로마서 12:14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저주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오로지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발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14을 보면 결국 발람은
모압 왕에게 자신의 사악한 꾀를 알려 주어서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을 하게끔 합니다. 그러니 발람이 얼마나 악합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고자
하는 그 백성을 저주합니다. 돈의 욕심, 명예의 욕심에 사로잡혀서 끝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결국 민수기 31:8을 보면 발람은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나귀가 보기에도 답답한 발람처럼,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길을 가면서도 이를 분변하지 못하고서 고집을 부리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자신의 능력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감각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영적인 방법으로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영적인 감각을 닫혀 있으면 하나님께서 대화하실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영의 눈과 감각이 닫혀있으면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자요, 축복받을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저주하는 것은 저주 받을 일입니다. 도리어 저주받을 자를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날마다 걷는 삶의 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우리의 완악함과 욕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닫히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그 길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다른 이들을
축복할 수 있는 복의 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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