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 중에 ‘어거스틴’이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교부라고 한다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기독교 신앙의 정통을 이어간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무엇인가? 삼위 일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들은 어거스틴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어거스틴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적인 출세와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
모니카는 그러한 아들을 보면서 날마다 눈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거스틴이
32세 때에 밀라노에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다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거스틴의 생활은 백팔십도로 바뀌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경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묻습니다. “어거스틴,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 때에 어거스틴은 대답을 합니다.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변화입니다. 영적인 변화와 삶의 변화입니다. 영적으로는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변화는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어도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에 너무 달라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대적하는 일들까지도 예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을 전적으로 모셔 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신앙생활 하는 것을 힘들어 하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온전하게 모시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떠한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두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금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금식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들이 행해야 할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은 대표적인 금식가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금식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 표정을 어둡게 하고, 옷차림도 남루하게 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고 한다면, 자신들이 일주일에 두 번 할 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일주일에 서너번 정도는 해야 할 텐데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경건치 않은 죄인들과 같이 음식을 드시면서 교제하시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극기야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경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라는 그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이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때는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혼인집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 순간이지, 슬퍼하며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지금 이 땅에 와서 너희들과 함께 있는데, 그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왜 슬퍼하며 금식을 하냐는 것입니다. 금식이라는
경건의 삶의 중심에는 누가 있어야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외적 경건의
모습은 외식이 되기 쉽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금식하는 것은 정말 경건한 일이요,
신앙생활에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금식이 내 경건에 진정한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관계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신앙적인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이어져야 합니다. 금식 만이 아닙니다. 모든 예배와 봉사, 선교 등의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경건의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참된 경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해 왔으니까 하고, 습관적으로 하고, 책임을 맡았으니까 의무적으로 하는 것들은 외형적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 일들의 동기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모시는 삶을 산다고 한다면, 먹고 마시는 동기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먹고 사는 형식은 똑같지만, 예수님을 중심에 둔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먹고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주님과 연관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경건의 삶, 그리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변화될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는
낡은 옷에 관한 비유입니다.
“낡은 옷이 있는데,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게 되면, 생베 조각의 기운이 낡은 옷을 당기어서 더 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생베라고
한다면 막 생산한 신선한 천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생베의 특징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좋은 옷감이 생산되기 전에 이러한 일들이 종종있었습니다. 싸이즈에 딱 맞는 티셔츠나 바지를 사서 입었다가,
한번 빨았는데 옷감이 확 줄어서 의도하지 않게 몸에 짝붙는 쫄티나 쫄바지를 입고 다니셨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생베가
꼭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에 있는 옷감에 생베를 기어서 붙이면, 나중에 세탁할 때에 생베가 줄면서 잡아당겨서
다른 옷감을 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낡은 옷에 생베를 기우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낡은 포도주 부대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포도주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는 새로 만든 가죽부대로 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가 가죽부대에 들어가서 발효하면서
팽창하게 되는데, 새로 만든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포도주가 팽창해도 그 새로운 포도주를 잘 담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낡은 가죽부대는 이미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포도주가 숙성할 때에 그 팽창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낡은 옷에 생베를 붙이고,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붓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베와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잠잠하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찢어지고
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경고를 제 딸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2013년 딸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케잌을 준비해서 자르면서 아이의 생일을 축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Now. I become a teenager.”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 올 것이 왔구나. 이 아이의 변화에 대해서 잘 준비하고
대처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5: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내 안에서 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의 모습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우리 안에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경건과 율법에 틀에 얽매여서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과는 너무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옷과 가죽부대를 찢어 버리고 터트려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사람들마다 고정된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생활 습관들을 가지게 됩니다. 삶의 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그러한 틀 안에서 예수님께서 머물러
주시기를 바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내 틀 안에서 허용이 되는 만큼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것만은 못하겠다고 불순종하기가 십상입니다. “안돼요
주님, 그 말씀은 내가 계획한 것과 달라요, 이것 만큼은 못하겠어요.” “주님, 내 삶을 이렇게까지 간섭하고자 하세요? 적당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내 틀에 맞추며 믿음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역사하심에 맞추어서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고집하던 생각과 가치관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과감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각과 가치관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못해요, 안돼요”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면 한번 해 볼께요” “좀
힘들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 볼께요, 주님 저에게 힘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뭔가를 하시려고 꿈틀 꿈틀거리시는데,
그것을 막고 있는 낡은 옷과 같고,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생명력 없고 굳어진 틀을
벗어 버리고, 이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나도 함께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운동력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마치 임신한 엄마가 그 배 안에 있는 살아 있는 그 아이를 날마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나를 주장하고 계심을, 주님을 모신 사람들은 날마다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내 안에서 움직이시는 변화의 역사를 나도 경험하고, 또한 나를
통해서 이 땅을 살리시고자 하시는 주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그 동안 지켜왔던 율법이 좋다고 말하면서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기의
그들의 경건과 생활은 외형적으로 볼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님의 생명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요,
외식적인 경건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만들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정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으로 더 큰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답답하게 해드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답답하게 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막상 보면,
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지 못한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포도주를 부어주시고자 하더라도, 우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 포도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며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낡은 부대를 버리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새로운 부대로서의 성도요, 가정이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그분에게 우리의 생각과 뜻을 맞추면서 살아갈 때에, 사람의 능력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성숙하고 변화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과 편견 속에서 예수님을 가두어 두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도록
내가 예수님께 맞추어서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는 우리 개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차원의 일들을 감당하며 사용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샘터 질문 1. 생활 중에서 나만의 독특한 생활 습관, 버릇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사람을 대할 때에 자신의 선입관이나 편견으로 인해서 실수해 본 적은 언제 있는가? 3. 예수님을 믿은 후 예수님께서 나에게 도전을 주시고, 뭔가 하시려고 하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4.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움직임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수용적인가? 부정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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