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몸에 타투(Tatoo),
문신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조직폭력배나 불량한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속을 표시하기 위해서 문신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까 많은 분들이 문신을 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에 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서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어떤 엄마 등에 아기가 업혀있는 것 같은데 자기를 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가까이 보니까 아이의 얼굴을 등에다가 문신으로 새겨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겨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또한 자신이 어떠한 조직에 속해있는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새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자신의 몸에 남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몸에 십자가 문신을 새기는 것보다 더 필요한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맨 마지막 부분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갈라디아교회는 사도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그곳에 설립했던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다음에 문제가 생겼는데,
교회 안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도 육신의 할례를 받아야지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육신의 할례가 곧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이고, 구원의 표식이기 때문이기에 받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육신의 할례는 받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시한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흔적은 육신의 할례의 흔적이 아니고, 예수의 흔적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때에 쓰인 '흔적'의 헬라어는
‘스티그마타Stigmata’입니다. '스티그마타'라는 단어는
소나 양의 소유주가 '이 짐승은 나의 것입니다.'라고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나타내는 고유한 글씨나 문양을 불에 달구어 짐승의 몸에 지져서 낸 표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 곧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는 표식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소유됨을
드러내는 삶의 흔적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을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흔적을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인시켜주시고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믿음을 다시 세워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이 두려웠기에 그들을 피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부활의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본 제자들은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은 그 분이 진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고, 이제는
부활하셔서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흔적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는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삶에 못자국과 창자국과 같은 고난의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의 흔적들이 바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구원받은 자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와 교회도 그 존재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 땅에 남기고 있는 흔적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예수의 흔적인지, 아니면 아직도 내 육신의 성정과 세상적인 흔적인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몸에 지녀야 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흔적은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먼저 예수님의 그 흔적은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죽으신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많은 고난의 흔적을 가지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예수를 거짓으로 모함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들을 보고서 말합니다. 이사야 53:4절,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예수의 고난이 예수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흔적은 전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은 바로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지시고 가신 고난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람의 삶 속에는 수 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예수의 흔적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때로는
무지와 실수로 인해서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나의 죄의 흔적이요, 어리석음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감옥에서 고생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수 많은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서 돈을 탕진해 버리고 집에도 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정을 지혜롭게 운영하지 못해서 당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러한 고난의 흔적들은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의 무지와 죄의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이 있지 않기를 위해서 경계를 해야 합니다. 나의 죄와 무지의 흔적들은,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예수님의 흔적은, 죄와 무지로 인한 흔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과 구원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도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의 흔적이 몸에 뵌 사람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면서 자신들은 구원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 사람들에게 적대을 받으며 고난을 당합니다. 특별히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힘없이 그 수 많은 돌을 맞고 견디다가 못해 쓰러집니다.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해서 그 몸을 성 밖으로 끌어내 버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돌로 친 사람들이 있는 그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돌에 맞아 상처가 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을 맞아 몸이 멍들고 머리에서 피가 난다고 할지라도
사도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흔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시관을 쓰신 머리에 난 상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상처로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들을 두려워해서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절에,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구하라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된 저와 여러분들은 사도바울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영광된 일이지만,
그 영광을 위해서는 고난의 흔적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보여주셨던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은 제자들이 경험해야 할 예수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3. 오늘날 우리의 몸을 보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예수의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내가 구원받았음을 만족하며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 세상에서는 복 받아서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게 살고, 자녀들도 잘되고, 건강하게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교회들도 물질적으로 풍성하고 거기에다가
크고 멋진 교회를 지어서 봉헌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셨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가운 것은 그러한 모습속에서는 예수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그 고난의
흔적을 받는 것에 대해서 거북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와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에게서
예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면 어디서 예수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역전도를
위해서 뜨거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낯선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전하는 그 흔적을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과 상처를 주님은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며 생기는 고난과 상처들의 흔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다가 생기는 상처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새날이 시작되면 주인 앞에 무릎을 끓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알기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그리고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습니다. 등에 있는 짐을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기에
낙타의 무릎은 볼품이 없지만,
그것이 또한 주인에 대한 복종과 순종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은,
영혼을 구원의 흔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와 교회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흔적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나타난 십자가의 흔적을 볼 때에 기쁘고 반가와 했습니다. 정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구세주인 것을 그 몸의 흔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흔적은 예수님의 고난과 수치,
죽음을 나타내는 슬픔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이후에는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광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의 흔적들은 부끄러움과 저주의 상처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그 고통과
눈물을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보시면서 너에게 나의 흔적이 있다며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예수의 흔적이 남기를 두려워하며 거부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세상의 흔적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어떤 예수의 흔적들이 있는지를 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그 기도의 흔적을 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여러가지 불편함과 손해를 감수한 흔적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더 많은 유아를 가진 부모가 출석하기를 소망하면서 하루 종일 유아실을 단장하기 위해 수고하신 흔적들도 보입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음하며 아파하는 흔적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흔적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싫어서 회피하려고 다른 배를 탔던 요나 선지자의 흔적도 보입니다. 세상의
풍요와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의 흔적들도 보입니다. 서로의 고집 속에서 갈등하며 상처받은 흔적들도 보입니다.
몸의 할례를 받았으니 구원받았다며 그것으로 만족하며 자랑하는 흔적들도 보입니다.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교회를 바라볼 때에 지녀야 할 흔적은 예수의 흔적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돌에 맞고,
채찍에 맞고,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몸의 흔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당하는 도전과 공격으로 인해 생긴 흔적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은 예수의 흔적은 수치와 부끄러움이 아니라, 칭찬이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주의 뜻대로 순종하며 감당했던 모든 흔적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예수의 흔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