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나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해야 하는데, 나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도리어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께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죄된 나 자신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부인하고,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전에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그랬더니 레위도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레위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 집으로 모시고 가서,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고서 이렇게까지 기뻐서 잔치까지 베푼
사람은 없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께 자신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레위와 같이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이 자리에 모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부르심에 대해서 잔치를 베풀면서까지 이토록 기뻐하며 감사해 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닙니다. 레위는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해서 감격해 하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불러주신 것은 세상의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쁜 일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격과 기쁨을 잃고서,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세리 레위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가졌던 그 순수한 기쁨과 감사의 모습을 통하여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를 때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살피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레위를 기쁘게 하였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기쁨과 감격속에서 믿음생활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인 줄을 아시고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리는 그 당시 모든 사람에 의해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의 하수인과도
같았습니다.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징수해서, 로마로부터
할당받은 금액은 로마정부에 상납하고, 그 나머지는 자신들이 취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공식화 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 레위의 초대를 받아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비난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는 것입니다. 세리는 누가
보더라도 죄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위 자기 자신도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레위를
당신의 12제자 중에 한 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12명으로 부르실 때에 사람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권세도 있고, 학문도 좋고, 인정도 받는 인물들로 엘리트
그룹을 만드시고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보다는 평범한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인인 세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가 어떠한
사람인지 몰라서 실수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 예수님은 레위를 세관에서 보셨고, 레위가 세리인 것도 아셨고 죄인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게 되면 문제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가 세리였기 때문에 찾아오셨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면서 세리와
죄인들은 너희들이 함께 먹고 마실 자들이 아니라, 그들은 멀리해야 할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에, 왜 예수님께서 레위를 비롯한 죄인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을 부르셨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병든 자를 의사가 고치듯이, 죄인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 부르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병든 이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사와 같이
그 죄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의롭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기는 죄인을 불러서 징벌하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깨닫게 해서 회개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죄의
병으로 인해서 죽을 것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았는데 죄인된 우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시고
불러주셔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레위와 같이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죄인된
세리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기뻐하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도리어 비난하고 불평해
하는 사람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자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의에 사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무시하고 멀리했습니다.
누가복음 18:10절에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명은 바리새인이고 한 명은 세리입니다. 그 둘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실 때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죄를 멀리한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 의롭게 되냐 하면, 내가 지은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정으로 회개할 때에 의롭게 되고,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의인이고 건강한 사람들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보다 더 심각한 죄의 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성을 깨닫지 못하고 의롭게
여기는 무지와 무감각의 병입니다. 자신들이 병든 줄을 알지 못하니, 자신을
고치러 오신 예수님께로 나아오지도 못하고, 그 은혜를 누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육신의 연약함과 관련해서 제가 너무 제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고 어리석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제 왼쪽 무릎주변에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 있습니다. 다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모두 무릎 수술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적당하게 운동도 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한 후, 운동을 하다가 왼쪽 무릎이 삐끗했습니다.
심한 통증이 있었지만 견딜 만 했습니다. 그래도 원래 건강한 체질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왼쪽 발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이 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지나다가 보니까 익숙해 지고,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에 다니시던 여자
권사님께서 제가 무릎으로 고생하는 것을 아시고는, 자신의 남편이 개인병원의 원장인데 한번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여름 방학에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고 보니, 무릎에
있는 근육 중에서 앞에 있는 근육이 끊어졌고, 끊어진 상태로 계속 움직여서 끊어진 근육도 닳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골도 찢어져서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며칠 후에 수술을 받고 방학 내내 병원에 있다가 보조기를 하고서 퇴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제 몸이 그렇게까지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연약한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 병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평소 하나님의 율법대로 의롭게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가 없고, 의롭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함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수고한 대가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어 그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수고하고 애쓴 대로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함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아 누리는 그 기쁨과 감사함을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나 커다란 죄의 병에서 고침을 받아 살아났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의사로부터 고침을 받았을 때에 그 병의 정도에 따라서 그 감사의 크기가 다릅니다. 감기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과 불치의 죽을 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기쁨과 감격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면 평생을 그 병을 고쳐주신 의사에 대해서 감사해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고쳐주신 병은 얼마나 심각한
병입니까?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죄의 병은 감기와 같은 시시한 병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병에 걸리면, 누구든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죽음의 병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그 죄의 병을 고칠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죄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죽을 죄된 존재였는지를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5: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덮을 정도로 더욱 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는 상황은, 자신의 죄가 어떤 이들보다 더욱 많다고 깨달아 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극히 크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했습니다. 자신을 죄인 중에서 최고의
죄인인 괴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였으니 얼마나 주님께 큰 죄인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큰 죄로 형벌을 치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와 주셔서 죄인의 괴수를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더 깊고 크게 누리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하다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감동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바리새인과 같이 늘 상 지켜온 말씀의 습관으로 믿음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의가 되고, 하나님께 그 보상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전락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는 더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나 자신은 다른 이들보다 믿음도 좋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하는 분들은 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을 잃어 버리고, 내 자신의 의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던 나를 찾아오셔서, 의사가
되셔서 고쳐주시고 구원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와 감격이
회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의와 공로로 차가운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잔치를 베풀었던 레위와 같은 벅찬 가슴을 가지고 우리 주님을 예배하며, 만나고 감격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의롭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만한 소양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저와 여러분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죄의 병을 고쳐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 죄인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에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병든 죄인이었기에 더욱 관심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신 그 은혜에 더욱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의롭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른 이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기 의에 사로잡힌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가질 수 없는 기쁨이 죄인된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또한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마다, 병든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기억하시며, 레위가 그 부르심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과 같은, 감사와 감격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삶 속에서 충만히 누려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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