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앞으로 그에게 있을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결단하고 그 성문을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그 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비장하고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면,
죽음의 두려움 속에 떨고 계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제와 같은 분위기입니다.
제자들의 온 무리가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폅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합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며, 소란스럽게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이 말씀은 지금 그들이 외치는 그 소리는 지극히 정당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입도 없는 돌들이 나서서 외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유대인이 꼭 지켜야 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특별한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서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어색하고
우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 나무를 흔들면서 환영을 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당시에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상황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앞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실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어떻게 오십니까? 나귀의 작은 것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나귀새끼를 타고 그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말씀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처럼,
왕되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일제히 기뻐하며 즐거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되심을 즉각 믿고 기뻐하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자신들을 구원하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쾌해 합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예루살렘에 주신 큰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이 돌들이 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돌들까지라도 외쳐야 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부르짖습니다. 호산나는 아람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외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를 제재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지하시고, 그 호산나의 외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향하여서 "호산나,
구원해 주십시오" 외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외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릴, 그리고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외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호산나의 외침은 이 천년 전 그들만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여전히 외칠 믿음의 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필요한 구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호산나'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다른 나라에 의해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영혼들이
죄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 사로 잡혀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살았지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전쟁과 테러가 많아 졌습니다.
깨어지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총기사고와 폭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약이 어린 학생들 사이에까지 퍼져 나갑니다. 경건한 자들을 유혹하여 쓰러뜨리는
악한 권세가 팽배해 있는 세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자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 사회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기도문의 한 구절과 같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더욱 간절한 기도와 외침이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한 대상으로 다른 것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돈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돈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호산나, 좋은 직장을 향해서 호산나, 세상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나의 인생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호산나’ 외침의 대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이름인 줄로 믿습니다. 호산나 외침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하시며, 나의 가정과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믿음의 고백과 외침이 돌들이라도 나서서 증거해야 할 중요한 외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만이 구원자라는 고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요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며, 구원의 왕으로 고백할 때에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왕으로 오신 구원자가 겸손하여,
나귀의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겸손하시고, 그리고 그 겸손의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호산나’의 방법은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멍에를 매듯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고, 사람들에게 핍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멍에와 같이 지고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귀를 타시고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셨고 그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결코 백마를 탄 개선장군과
같이 자신의 말발굽아래에 모든 것을 밟아 무너뜨리는 방법이 아니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힘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방법은 사탄의 방법입니다. 호산나 외치는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답게 강력한 힘을 규합하여서 로마에 대해서 대항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강력하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시면서 온 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죽어갈 때에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W.헌터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방법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강력한 힘을 보여 달라고 그렇게 열렬하게 환호하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어떠한 저항도 없이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제자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랐을 때에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다.”라고 하시며 꾸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저항없이 로마인들에게 끌려 가셔서 채찍을 맞고,
사람들 앞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판장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할 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질문할 때에 더욱 거세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며칠 전에는 ‘호산나’하며 구원해 달라고 열렬히 맞아들이더니,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큰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저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며칠 전 예수라는 청년에게 기대를 가지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환호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산나의 외침은 분노로, 배신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호산나 외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호산나 외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나의 기대와 방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예수님의
방법을 의지하며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치는 자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고통과 어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홍해바다를 갈라서 그 사이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광야생활을 먹게 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막고 있던 견고한 성 여리고성을 어떤 무력도 사용하지 않고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말씀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게 사람의 방법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이 나의 생각과 방법과,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기막힌 때에 기막힌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 어느 때 보다도 호산나의 외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느 때보다 죄가 많고 유혹이 많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만한 죄는 죄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도 이성과 돈의 유혹속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세상의 바쁨과 분주함, 물질숭배사상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관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물질이 풍요하고 건강하면 그것이
복이라고 여기며 영혼의 갈급함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로부터 우리는 구원함을 받아야
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 홍수, 토네이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 가정과 자녀, 교회와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문제가 없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이 간절한 때입니다.
돌들이라도 외치게 하겠다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듣고자 원하시는
‘호산나' 외침은 나만의 구원을 바라는 이기적이거나 ,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서
나오는 구원이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호산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우리의 마음을 합하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어려움과 고통에서 해결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가 해결받아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많은 문제들,
이것을 위해 중보하며 호산나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구원해 주소서,
이 사회를 구원해 주소서. 특별히 고난주간을 우리가 지날 텐데,
이 세대 가운데 구원이 필요한 상황들을 돌아보시면서, 호산나의 간절한 외침이 있기를
바라고, 그 응답이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