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며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부활 전에 죽음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했고,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연로하셔서 죽으시고, 교통사고로 죽고, 질병으로 죽습니다. 먹지 못해 기아로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초에 5명 정도가 굶어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도 죽었고, 지금도 죽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젊은 나이에 험한 모습으로 죽으시긴
했지만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뭐 그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일입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죄지은 것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죄 씻음의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어 줄 양과 같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지은 사람이 그 죄로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대신에 그 짐승을 대신해서 받으시고, 죄지은 사람의 죄는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물로 쓰이는 짐승은 다른 짐승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흠도 없고 깨끗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같은 죽음이지만, 속죄 짐승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대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짐승제사를
받으시고자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대신에 모든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한 번에, 영원히 해결하신 방법을
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만한, 어떠한
죄의 더러움이 없는 제물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니 제물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유일하게 찾으신 분이,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대속할 만한 유일하고 충분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게 해서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담당해야 할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죄를 대속해 주신 구원주로 믿는 자마다 그 공로로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죽음과 다른 것은 바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지만, 삼일 후에는 살아나실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부활을 믿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부활하실 날을 카운트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부활하시기 삼일 전, 이틀 전, 그리고 부활하실 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을 목격하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에서 밤을 세우면서 진을 치고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고, 부활절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가장 부활절을 기다리시는 분들 중에는, 고난주간 동안 금식하신 분은 누구보다 간절히 부활절을 기다리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기 보다는, 예수님이
죽으신 일로 낙망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실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부활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부활하셨을 때에는 무덤속에서 나오셔서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로 멸망의 길로 가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속죄함을 받아 생명의 길이 열린 그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셔서 다시
살아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볼 때에 얼마나 감격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 이후에 우리가 가져야 할 부활신앙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하여서 고백해야 할 믿음의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1.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더 이상 죄의 정죄함을 없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를 깨뜨렸듯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도 죄의 권세를 깨뜨린 장본인이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 죄가 많고 아직도 멸망의 길로 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의 권세의 다스림 속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며,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평생에 관심했던 것은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살던 16세기 유럽은 강력한 천주교 신앙이 점령하고 있었고, 천주교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더불어 사람의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고자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선한 일들을 했지만, 그 마음속에 자신은 구원을 받기에 충분치 못한 죄인이라는 정죄함이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법학을 공부하던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이웃에
있는 도시를 다녀오다가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비바람을 맞으면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그 공포속에서 마틴루터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도 구원의 확신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날마다의 경건의 삶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평생 바램이었던 법학공부를 때려 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사가 되고, 나중에 신부가 되어서 경건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죄의 정죄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임사제에게 가서 신부가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했습니다. 그런데 마틴루터가 너무 자주 고해성사를 하러 오니까 이 사제가 마틴루터에게 부탁하기를 "루터, 제발 부탁인데 이렇게 자주 여러 번 오지 말고, 죄를 한꺼번에 모아 두었다가 한번에 와서 고행성사를 했으면 좋겠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마틴루터는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과 공포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할 계기가 되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그의 마음속에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속죄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시 천주교의
구원에 교리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더불어, 사람이 이에 맞는 공로의 삶을 살아야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마틴루터는 성경 말씀에 따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게 됨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마틴루터는 죄로 인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를 정죄하던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깨끗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저와 여러분들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우리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확신가운데서, 죄와 사망의 권세자인 사탄을 상대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보여주셨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승리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바로 성도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19절에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뿐이고, 죽어서 어떠한 것도 없다고 하면 성도들처럼 불쌍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도바울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때로는 원형 경기장에다가 기독교인들을 몰아 놓고, 그곳에 사자를
풀어서 기독교인들이 잡아 먹히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네로 황제에게 잡혀서
목이 잘려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토록 이세상에서 불쌍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편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는 여러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죽음 이후에 있을 그 부활을 통하여서 이제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누구로부터 보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시 살게 될 것을 믿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확신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몸소 부활하셔서 그 몸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부활하여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누릴 존재로 택함을 받은 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가 죽을 곳이고,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자들이 영원히 누리면서 살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계신, 하나님의 나라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자기 과시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꼭 보여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으시고, 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끊을 수 있는 권세는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땅의 사탄의 권세를 물리칠 승리의 이름인 줄로 믿습니다. 사탄의 정죄와 죄의 유혹과 시험이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악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그 첫 열매가 되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서 얽매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늘 바라보며, 이 땅의 악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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