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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주일에 믿음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간청합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늘 점검하며,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보다 작을 지라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성장하여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룰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의 믿음을 살피면서,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렇듯이, 로마교회도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는 역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세계의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로마에 왔고, 로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생각과 문화,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상태도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그 다양함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던 것은, 6절의 말씀과 같이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다양함 속에서 사도바울은 한 마음과 한 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양한 모습들이 있어서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그 모습가운데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하나님 만이 세상의 참된 신이요, 존귀하신 분임을 드러내는 데는 한 마음과 한 입술로 그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은, 믿음이 강하던지, 약하던지에 상관없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무리 차이가 나더라도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루어야 할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이 일치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7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받다'라는 것은 서로를 영접하고, 환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마음과 한 입술로 영광돌리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받고 환영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관하게, 하나님만 잘 예배하고 내 신앙만을 지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차이가 있고 다름이 있음에도 서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를 용납하고,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계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서로 꼭 필요하신 분들입니다. 서로를 받는 것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제 서로를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서로를 받으라는 것은 서로의 약함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하철의 좌석을 보면 노약자 보호석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하철에 이러한 노약자 보호석이 있다고 합니다. 연로하신 분이나, 임산부들, 장애인들은 육신적으로 약한 사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선적으로 않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서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함을 가지고 약한 사람의 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 선하고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류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로,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강함으로, 믿음의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을 받아줄 작정이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예로 들 때에, 고기를 먹고 못 먹고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는 이방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우상의 제물로 쓰였던 고기들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고기를 대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었는데 그 입장에 따라 믿음이 강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을 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기를 대할 대에, 고기가 비록 우상에게 드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우상은 의미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에 거리낌없이 먹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가 있으니,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를 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못 먹고 하는 것으로 믿음이 강하다거나 약하다고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약한 자들의 연약한 부분을 비난하지 않고, 그것을 담당하고 수용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16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익에 따라서 절제하며 살았는데, 그 유익은 자신의 유익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의 믿음이 강건해 질 수 있도록 연약한 자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든, 강한 자들, 모든 교회의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을 믿음이 강한 자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 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약점까지도 담당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의 강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이전에, 이미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를 받으신 분이 있으십니다.

로마서 14:3절에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나 모두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도 그러한 하나님을 따라 다른 이들의 약점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육하신 예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서 42장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글입니다. 그런데 메시야의 성품을 말할 때에  42: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상함을 고쳐주시고 치유하여 주셔서 다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그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불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병이 들어 죽어가는 인생, 연약한 인생을 꺾거나 끄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고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죄로 병들어 죽어가는 저와 여러분을 고쳐주시고, 살려 주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예수님 앞에 내려 놓으시고 아뢰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비판하며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며 치유하여 주시고 새롭게 세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믿음으로 세워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마음과 한 입술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서로 받으라는 것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서로의 약점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을 기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선하지 않고 덕이 되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그 모범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고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모습이 희게 변하셨던 변모산 사건이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그 때에 그들을 덮은 구름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었던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을 막으셨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쁜 소식, Good New 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시고자 자신을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생애를 보면 이웃을 위해서 많은 헌신을 하시며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를 시작하신 웨슬리 목사님은 특별히 주변에 소외된 이웃들을 기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씀씀이를 줄이며 사셨습니다.

이웃을 구제하기로 결심한 첫해에 삼십 파운드를 벌어 이십팔 파운드를 생활비로 쓰고 이 파운드를 구제로 썼습니다. 다음해에는 수입이 배로 늘어 육십파운드를 벌었고, 여전히 이십팔 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삼십이 파운드는 이웃을 구제하는데 썼습니다. 셋째해에 수입이 구십 파운드로 뛰었으나 역시 생활비는 이십팔 파운드만 쓰고 육십이 파운드는 구제했습니다. 넷째해는 백이십 파운드를 벌어 다시 이십팔 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구십이 파운드는 가나

난한 이웃에게 주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기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십니다. 그것이 서로를 받는 일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3. 서로를 받는 일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서로를 받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사람들을 기쁘시게 하시고자 이 땅 가운데서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셨지만, 도리어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예수님께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향해서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거짓으로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으며 연약함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자 살아갈 때에 자신도 이를 행하는 것이 쉽지 않고, 상대방도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가 바라볼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입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을 묘사하기를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받으시기 위해서 인내하셨습니다. 죄된 사람들을 인내하시며 참으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시는 일이 있으십니다. 5절에,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받아 주고, 이웃의 기쁨이 되기 위해 비방을 받고, 때로 나의 기쁨을 양보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더 하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받으면서 바라보아야 할 분은, 그 상대방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담당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하늘의 소망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목표는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받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서로를 받는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심으로 모범이 되셨고, 그 모습으로 서로를 받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서로의 약함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여서 이루어지는 미숙함과 죄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 연약함을 담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신 것은, 그 믿음으로 자랑하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강함으로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그들을 기쁘게 섬기라고 주신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과 가정, 그들의 삶속에 있는 아픔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연약함을 받으시고,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던 자리로 이끄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서로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원합니다. 우리의 다양함과 차별됨이 상처와 아픔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서로 뜻이 같아지며,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한 소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됨의 근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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