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완벽하게 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획하신 길이 있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선교여행 중에 그러한
일을 종종 경험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사도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전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대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접고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 읽으신 말씀도 보면, 사도 바울의 선교 일정이 바뀐 것을 봅니다. 바울은 원래, 고린도를 갔다가 마게도냐로 간 다음에, 다시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변경되어서 일정에 맞게 고린도교인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던 바울을 시기하던 거짓교사들이 이것을 빌미로 해서 사도바울은 비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경솔한 사람이고, 그가 계획을 변경한 것은 자신의 육체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악하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친 말씀들도 이와
같이 경솔하고,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서 한 일처럼 몰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자신의 계획이
경솔하게 세워진 것도 아니고, 자신이 육체의 유익을 따라 계획을 변경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뀐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다른 계획이 있으셨고, 그 뜻에 “예”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변호합니다.
그러면서 18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미쁘시니라"합니다. ‘미쁘다’라는 것은 ‘신실하다. 믿을
만 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뀐 것은 바울이나
고린도 교인 모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이 있으신 것이고, 이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예"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자신의 계획과 어긋난 하나님의 계획을 향해서 “Yes”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믿으면서 “Yes”하는 삶을 살았는지 한번 살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사람들은 자신들
마다 “예쓰”의 대상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에 사도 바울을 향해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계획하였다.”라고 비방했는데, 사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에 대해서 “예쓰”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육신이
즐겁고 편하고 만족스러운 일을 위해서 계획하고 “예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6:8절에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육체를 아름답고, 건강하고,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요구에 “예쓰”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허무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특별히 오늘날 젊은 세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청소년은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의
말에 "예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성향일 것입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이 싫어도, “NO”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오고, 힘들어지게 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예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직장의 상사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 무력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원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요구에 "예"라고
응답하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강사를 모시고 부부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강연을
하시는 강사가 남편들을 향하여서 말하기를, "이 교회에는 공처가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남편 분들 중에서 자신이 아내의 말을 잘 듣는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른 쪽에 앉아 주시고, 반대로, ‘나는 아내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신 다면 왼쪽 편에 앉아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모여있던 남편들 모두가 아내의 말을 잘 듣는다는 오른쪽으로 다 몰려갔습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겨우 한 명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강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그 남자에게 물어 봅니다. "당신은 왜 아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나요?"라고 질문을 했더니, 그 남편이 말하기를 "강사님, 제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다뇨? 저는 아내의 말에 ‘노’를
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른쪽으로 앉으셔야지 왜 그 쪽에 앉으셨어요”라고 강사가 재차 묻자 그 남편이 대답합니다. “제 아내가 오늘 아침에, 사람 많은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해서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예쓰’의 대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예"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자신의 계획과 다를 때에도, 자신의 계획과 방법보다 더 우선하고 선하심을 믿기에
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간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로 순종한 일이고, 그곳에
전한 말씀도 바울의 인간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함으로
이루어진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설령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해를 사고,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순종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바울과 같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여긴다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쓰"하는 삼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가, 하나님께 “노”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예”를 할까 “아니오”의 과제가
아니라, 무조건 “예”로
응답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모범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예쓰"하는 "Yes Man"의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2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하신 약속이 구약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옛 언약’을 말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약속이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예’하지 않고, 하나라도 ‘아니요’라고 하였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예”만 되었기에,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믿음의 고백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예”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우리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원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나, 예수님만이
아니라, 이제 고린도교인들도 마땅히 하나님께 "예쓰"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하는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과 같이 교인들에게도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들은 아무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왕, 선지자에게 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예"하는 사람들로 성별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자임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해 주신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제사장이나 왕,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쓰"라고 말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고민 중에서 하나가 "예스"할 것이냐? "아니면 "노"할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않고 하나님에게는 예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말로만 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예”는 당연한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말만 “예”하고 포도원에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싫습니다. 아니오”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하는
것은 입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기 위해서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 “예”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먼저 나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아니오”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습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이 죽지 못하고, 나의 죄성을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예”만
되시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지셨고, 결국
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예"라고 할 수 없는 똑같은 존재입니다. 나를 부정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만 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쓰"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예쓰"하거나 "노"할
선택의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예쓰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님을 우리
마음가운데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듣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멘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멘의 신앙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지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 아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신실하신 분임을 믿기에 나의 계획과 다르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멘하는 것입니다. 아멘의 신앙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비록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하신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능력이 있으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할까 ‘아니오’할까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의 삶을 사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라고 위해서, 나에게는 감히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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