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린도전서
13:11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오늘날,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성숙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이 미숙했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수 많은 국민들을 책임지는 대통령에게도, 사회의 발전을 주도해 나가는
기업인에게도,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에게도, 자신
조차도 책임질 수 없었던 어린 철부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벗고,
장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철원에서 목회할 때,
두 주에 한번씩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방문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함께 놀아주며 봉사를 했었습니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주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대부분 저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어른 분들이었는데도, 말하는 것이 서툴렀고, 스스로 생활하기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어른이지만 기저기를 차시고 다니는 분도 계셨습니다. 나이는 한창 어른이지만, 몸과 정신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생활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할 때도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의 단계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육신의 살아온 나이와 상관없는 영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다른 신앙인들의 성장을 위해서 살피고 돌봐주는 믿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깨달아서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신도 이러한 믿음의 성장단계를 거쳐왔음을 말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자신도 어린아이와 같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 어린아이 때의 일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 신앙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보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같이 버려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일은 어떠한 일들이 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사도바울은 자신이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할 때에,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
1-2절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령한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그리고 또한 예언하는 신령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참 성숙하고 장성한 자의 말을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듣기에 신령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말이 아니라, 한낱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소음과 같은 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에서 하나가 은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영적인 은사를 받는 이들이 많아 졌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말들은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교만해 지게 되었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귀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신령한 말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도리어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 교회가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사랑없이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시기하고 다투는 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요,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가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상종하지 못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지 않고, 그 땅을 피해 멀리 돌아서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지역을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요한의 말은 사랑이 전혀 없는 무자비한 말입니다.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말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십니다. 그러니 “보아너게”라는 별명은, 요한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할
때에 가졌던 별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장성한 후에는 그러한 말을 버렸습니다.
도리어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할 것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의 말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방언과 예언과 천사의 말들이 성숙한 자의 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정을
살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유익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장성한 자의 말이 됩니다. 2. 또한 사도바울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버린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데 비해,
어떤 것을 깨닫는 이해력은 어른만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존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성숙해 지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겪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탈선을 하는 청소년들이 간혹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 혹시나 잘못 될까 봐 사랑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서운할 정도로 생활을 규제하기도 합니다. 매를 들기도 합니다. 자녀들
중에는 그것이 못 마땅하고 부모님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에게 반항도 하고,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이었음을 비로서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피부에 느껴지는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선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메리
스티븐슨 이라는 사람이 쓴,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 위로는 내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각 장면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나와 주님에게서 사라지려는 순간, 나는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내 인생의 행로에서 여러 번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가 매우 슬프고 괴로웠을 때 일어났따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너무나 괴로웠던 나는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너는 항상
나를 따를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오직 나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더군요.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필요했던 바로 그 때 어찌하여
주님을 내 곁을 떠나셨는지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어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네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나는 한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가던 때였느니라. 모래 위에 새겨진 그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주님께서 나를 떠나셨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며 섭섭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그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눈에 보는 것이나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판단하며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감각들은 불완전한 것이기에 그것에 근거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한다면 실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장성한 사람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믿고서 그 상황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설령
환란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고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근거로 해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상황과 감정에 의존해서 깨달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근거해서 상황을 깨닫는 것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3.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버릴 때에,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돌보기에는 그 생각의
틀이 협소합니다.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만한 성숙함이 없습니다. 성숙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이웃,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숙하게 되면 내 생각의 폭이 넓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관심하게 되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에 나 또한 행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정 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너무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은 날마다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고,
남편과 자식들은 말도 안 듣고, 늘 말썽만 피우는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치고, 살아갈 의욕도 생기지를 않아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더 이상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 다 이해한다.
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다. 앞으로 9일 동안 내가 말하는 대로 몇 가지 일들을 해야 한다.” 그 여인은 반가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지 않겠니? 그래도
마지막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 좀 해두렴”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습니다. 삼일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않니? 네가 죽은 후에 아이들이 너를 기억하면서 살 텐데, 엄마가 자신들을 사랑했다는 좋은 기억은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니? 힘들겠지만 앞으로 삼일동안
만이라도 아이들을 최고로 사랑해 주렴”그 말을 들은 여인은 삼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갈 때가 삼일
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제 마지막 해야 할 일을 말해주마.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이제 남은 삼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으로 친절하게 대해 줘봐라.”
그 여인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서 삼일 동안 최대한으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삼일 후,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딸아, 천국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구나. 그런데 가기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이 여인이 자신의 집을 돌아다 보니, 그 전과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더러운 집구석은 깨끗하게 변해 있어서 보기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있었고, 남편은 자신을 향해서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집을 보면서, “아, 내 집이 바로 천국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란다.” 그때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나님,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가며 살아 볼래요!” 믿음생활
할 때에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뭐든지 해 주기를 바라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믿음 생활하는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해지게 되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관심하고, 주님의 뜻하신 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내 삶의 진정한 가치로 여기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이기적인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맞게,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린아이 때와 같은 시절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말과 깨달음과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의 말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의존해서 나오는 메마른 말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이 둔한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느껴지는 감정에 의존해서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내면에 흐르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기에는 둔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내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사로
잡혀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 특히 하나님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4:15절에서,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변화되어져 갈 때에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 말과 행동,
생각들을 버릴 때에 장성한 성숙한 신앙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다른 이들의 형편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자의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제대로 알 때에 이 세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오는 시련과
환란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장성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교회에 장성한 자가 많아,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능히 돌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뜬히 감당할 수가 있는 성숙한 성도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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