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2016 - 감사와 감사 사이 [시편 136:1,9-1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교회학교 학생들과 함께 전교인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서 참 기쁩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중에서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감사하지 못하고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되면, 감사할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고,
감사할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36편을 지은 시인은 자신의 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그는 감사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은 어떠한 문학적인 기교를 담은 시라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을 담은 감사 노트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시인이 이 시를 써 내려 갈 때에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커지고 기뻤을까가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라면, 어느 누구라도 써 내려갈 수 있는 시이고, 또한 이 시인이 가졌던 감사의 벅찬 감격을 모두가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를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회복되어야 할 감사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리고 우리는 각자는 어떠한 감사의 시를 써내려 갈 수 있을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들을 통해서 감사의 내용들을 발견함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을 보면, 보통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갈만한 것들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을 발견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바라볼 해와 달들을 보면서도, 그것들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을 보면서, 그 안에 감추어진 감사의 내용을 발견하고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시작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일상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고,
감사하며,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성도로 하여금 감사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들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과 눈을 가립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하고, 원망과 불평의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시들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어느
교회의 사모님께서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다가 위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원망과 설움이 올라왔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의 길을 걷게 한 목사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을 병들게 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스승인 신학교 학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학장님은 목사님의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고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형편을 학장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모님의
딱한 형편을 들은 학장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 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사모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이제 죽을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그래도 마지못해 그 노트를
받아 든 사모님은 무엇이라도 적어 내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한참 동안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들에 대한 감사가 떠 올랐고 이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이렇게 감사의 내용을 적어 내려가지만 말고, 감사해야 할 분들에게 직접 가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사모님은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 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며칠을 지냈는데 몸에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웬일인지 다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결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어려웠던 때에도 감사할 내용이 있었고,
감사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당연히 여기며 감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되니까, 감사할 것들이
흙속에 묻혔던 보물과 같이 반짝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평했던 마음이 감사로 변하게 됩니다.
그 은혜로 마음이 치유함을 받고, 몸이 치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선하신 일들을 찾고,
그 일들에 대해서 감사할 때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시를 읽어보면, 시인에게는 감사의 내용만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사실 그 감사와 감사의 사이에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이에게 감사하라고 할 때에 그 이면에는 애굽에서의
종노릇을 하던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했을 때에는, 홍해로 인해서 길이 막혀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애굽 사람들에게 죽을 것 같은 공포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했을 때에는 광야 40년 동안 거친 광야를 떠 돌아다녔던
불안과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있기 일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에 돌이켜 보니,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시인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자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감사할 만한 일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감사와 감사 사이에, 고통과 어려움의 순간들이 있지만, 그러한 일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시인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1절에 명시를 하고서 감사를 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인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내가 좋아하는 기뻐할 만한 일들을 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조건적인 감사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일들이 있고, 광야의 거친 땅을 가며 굶주리고 피곤할지라도 그것이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짐을 믿고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날 때에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았습니다.
입에 불평 불만을 달고서 살았습니다. 그 때의 사람들의 입에서, “주께 감사하세 주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노래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주께 불평하세, 주는 악하시며 진노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모든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일들을 당하지만 끝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악하고 불평이 많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에 있던지, 좋지 못한 환경에 있던지, 편안하던지, 불안하던지,
푸른 초장에 있던지, 음침한 골짜기에 있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상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근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특별히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청교도의 삶을 통해서도 이러한 감사를 볼 수 있습니다. 16-17세기에 유럽은 로마 캐톨릭교회의 부패에 반대해서 개신교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영국도 로마의
캐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서, 영국만의 국가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국교회가 만들어진 계기가 신앙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헨리8세라는 당시 영국왕이,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와 이혼을 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
캐톨릭교회에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로마 캐톨릭교회로 결별하고,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영국만의 국가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로마 캐톨릭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던 영국의 개신교인 중에서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정결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Puritan 청교도들이라고 했고, 그들은 영국을 떠나 순수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1620년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당시에는 새로운 개척지인 미국으로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원주민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그 다음해 가을, 첫 수확물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렸던 것에서 유래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그들이 농사를 잘 져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풍요하고 상황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102명이 배를 타고 떠났는데
대서양을 항해하는 66일간 물과 양식이 부족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혹독한 추위와 영양실조로 그 겨울에 44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첫수확을 거둔 것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추수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많고 풍요한 것들을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풍요를 위해서 살았다면 잘 살았을 것입니다.
더욱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믿는 것이었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처해진 외부적인 환경에 근거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힘들고 거친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였고,
그것이 추수감사절을 지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감사의 내용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을 벌이던 중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무려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만 갇혀 있어도 건강을 잃고 나오는데, 당신은 27년 옥살이를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건강합니까? 도대체 그 비결이 뭡니까?” 그 때 만델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
노동을 할 때도 감사했죠. 건강의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있습니다.” 그 후 그는 노벨 평화상도 받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아이작
월튼이라는 영국의 수필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인데 한 곳은 천국이요, 한 곳은 감사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마음속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모시게 되면,
감옥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감사가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그 감사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욱 이끌고,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모신 천국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해 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깨달음에 근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내 중심에 모시고,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모신 천국의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
감사와 감사 사이에 긴 고통과 불평의 상황들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줄로 믿습니다.
환경에 의해서 감사와 불평이 교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으며, 모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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