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축하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찬송하는
말로 그의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으신 긍휼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도 많으신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을 가지고, 성도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로 거듭나게 하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긍휼이 아주 크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거듭나야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절에,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관원인,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거듭나야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구원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많으신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번 태어납니다. 육신적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 태어나는 것 밖에 모릅니다. 니고데모로
한번 태어나는 것 밖에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 때에 걱정부터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육신적인 태어남이 아니라, 영적인 태어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과거의 죄된
삶은 죽고, 이제 새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전도할 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번 죽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육신적인 죽음만 경험하고, 영적인 영생에 이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토록 하나님 아버지는 많으신 긍휼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긍휼을,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을 마땅히 찬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산 소망, 그리고 또 하나는 죽은 소망입니다. 소망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을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하면, 1절에 보니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아시아지역으로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서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으로 눈으로 보면, 그들은 별로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로 손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국으로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살고 있으니, 잘
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어렵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소망이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기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산 소망을 있게 해 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가진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소망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망과 같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성공해서 잘 살고, 영광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소망이 영원하지 않고, 결국은 허무하게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가치가 없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리고
죽으면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죽은 소망입니다. 그것을
붙잡고서 평생을 힘들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을 소망의 근거로 두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 두어야 할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들을 위하여서, 하늘의 유업을 하늘에 간직하고
계시다고 베드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가
가지는 산소망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고, 더럽고, 쇠할 것을 소망으로 하고 살아가지만, 산소망을 가진 거듭난 사람들은
썩지 않고, 정결하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
살아갈 수도록 겉사람이 후패하는 것을 보면서 소망이 죽어갑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낙심합니다.
그런데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겉 사람이 후패할 수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가 더 가까이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영이 날로 새로워집니다.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의 겉사람이 후폐하고, 이 땅의 소망이 끊어질 수록, 이 땅에 소망을 두고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고서,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 받을 자로서 준비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산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으로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물려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들, 그래서 산소망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거듭난 자들의 산소망은,
그것이 고난의 상황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6절에 보면,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으로 인하여서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근심이 잠간이 되고, 도리어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박해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만을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 고집하는 것을 보고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 박해 중에는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다 모아 놓고,
사자를 풀어 놓아서, 기독교인들을 짐승의 밥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 런데 원형 경기장에
들어갈 때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애들아, 조금만 참으면 된다. 아주 조금만 참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간단다. 조금만 잘 참으면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된단다. 조금만
잘 참자"라고 아이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원형
경기장 밖에는 로마황제가 보낸 황금마차가 늘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그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와 황제가 하사한 땅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그 황금마차를 타고, 원형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갈 때에 수 많은 도전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를 '잠간 근심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산소망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후서 4:17-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임한 환난과 어려움으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것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곳에서 환란과 어려움을 당할 수도록 더욱 더 하늘을 바라보면서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잠간 근심되는 일이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근심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잠간 근심되는 일이 있지만"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근심과 염려가 올 때에 잠간 근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근심은 잠깐이면 됩니다. 근심된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늘에 소망을
품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소망을 가진 이들은 낙심하는 이들이 아니라, 낙심될 만한 순간에 더욱 하나님으로 인해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산소망을 가진 자들이 근심된 일을 만났을 때에 특징인 것입니다.
3. 또한 산소망을 가진 사람은, 근심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5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기 때문에 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7절에, 이 편지를
받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확실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환난을 당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냐 하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금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치는 과정은 불로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해서 그 안에 불순물들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그 순도를 높이게 됩니다. 그런데,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은 그 정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연단을 거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의
삶에서 불순한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환란을 당할 때는 믿음의 연단을 받는 때입니다. 환란
때에 성도는 이 땅에 있는 죽은 소망으로부터 눈을 돌려, 산소망을 더욱 붙들게 되고, 믿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샘터시간에, 언제 가장 큰 믿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에 여러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암이나 큰 사고와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더이상
세상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산소망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연단케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로 이러한 고난가운데 산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이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세상 사람들에게 받으려고 애를 쓰고 수고합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부터 오는 것들은 썩어질 것이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칭찬과 인기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 인기와 존귀함이 떨어지게 되면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믿음으로 산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썩어지거나 쇠할 것도 아닌,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받을 칭찬, 영광, 존귀를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많으신 긍휼하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산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소망을 가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어지고, 쇠할 것을 두고서 소망을 걸면서 평생 살아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유업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하여 시험과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산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산소망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 집니다. 그 때에
잠깐의 근심을 지나, 하나님으로 인해서 더 큰 기쁨을 얻는다면 우리는 산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불과 같은 시험이 많이 있지만, 그것으로 잘 연단되어서, 장차 주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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