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라는 것은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그 먼 길과 긴 시간을,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제사를 드리러
갔던 것입니다.
역대하 29:30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레위인들에게 명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 했습니다. 번제단 위에 제사를
드릴 제물을 올려 놓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제물을 태워서 드립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허락하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기쁘고 복된 일입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좋은 짐승과 곡식을 제물로 준비했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고달프고 아까운 일이 아니라, 도리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에 예배 드리는 이들로부터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기 때문 입니다. 예배를 사모하며, 기뻐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과 은혜의 하나님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는 것은, 구원받은 죄인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특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러 모리아산으로 가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아주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구원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기 보다는,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받으시길 원하시는 끔찍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 동안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렸던 하나님은 자신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장 잔인하고
두려운 하나님을 대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받으시겠다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아들을 데리고 제사드리러 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을 하시는데, 제사와 제물을 가지고 시험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증명되는 곳입니다. 죄지은
자가 속죄제물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이 제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기에, 하나님께서 번제로
요구하시는 양과 염소 같은 제물들을 드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이들은, 제사를 통해서 나를 구원하시고, 화목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제물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외아들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삭을 귀하게 여기는 지를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더욱 이삭을 제물로
받으셔야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지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그 제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는 제사라기 보다는,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아프고
절망적인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원하시는 그 제사를 통해서,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잔인하고 공포스런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시는 그 공포스러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두려움속에서 모리아산으로 제단을 쌓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은, 늘 구원과 은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삶의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구속의 은혜가 크지만, 또한 동시에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죽게 만드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러한 하나님을 외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제사를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필요없다고 떠나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제사의 자리는 그의 삶의 중심과도 같았습니다. 양을 요구하시던, 아들을
요구하시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 제물을 삼고자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한 제사입니다. 이것이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순종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사울 왕 같은 경우에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러한 잘못을 저지릅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다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을 다 전멸시킴으로, 그들이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그 죄를 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그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사람과 짐승을 다 전멸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짐승들을 보니까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하찮아
보이는 짐승들은 죽이고, 좋은 것들은 살려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그것을 보고서 책망을 하니, 그가 변명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좋은 것들은 살려서 잡아 왔다."고 말합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
아니라, 자신이 드리고자 원하는 제물에 관심했던 사람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기쁠지 모르지만,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기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중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의 순종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셨는데,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는 제물로 드릴 제사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사울왕은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끄신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버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울보다 더 큰 도전을 주십니다.
"그 동안 너는, 너를
인도하시고 부요케 하신 은혜의 하나님께 제사하며 그분을 만났는데, 이제 네가 생명과 같이 여기는, 너의 가장 좋은 것을 취하고자 하시는 그러한 하나님도 제사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만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내 삶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것조차도 달라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달라하시면, 제물로 드려야
하는 것이 제사요, 예배의 삶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들었을 때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3절에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제물, 이삭을 데리고, 두
종과 함께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삼일길을 모리아산으로 제사드리러 갑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배웅을 받으며 모리아산으로 제사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리아산까지의 삼일의 시간을 가지게
하십니다. 제사드리러 가는 그 길은 너무 길고 아픈 길이었을 것입니다.
시험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이번 한번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고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차라리 그러한 하나님과는 이번 기회에 단절을 해 버릴까? 별 생각들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제사드리러 가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뒤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제사 드리러 가는 그
길은,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죽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주장할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영적인 전쟁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들 이삭에게 미안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부쳤을지 모릅니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을지 모릅니다. 제사드리러 가는 삼일 동안, 이미 자신을 죽이고, 아들 이삭 또한 이미 마음에서 죽이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오로지 그 삼일의 길 동안 그 안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기를 바라며 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이 드리고자 하는 제단은 단순히 자신을 구원하고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의 제사가 아닙니다. 제사를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기에 아들까지 바치라고 하시냐고 그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고, 자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드리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모리아산에 도착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부터는 종 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불과 칼을 자신이 들고, 아들에게는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자신의 아들을 잡을 칼이 있었고,
그를 번제로 태울 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에게는 자신을 태울 나무가 짊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사에 가장
중요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걷습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이삭에게 자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번제물이라는 사실을 숨깁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그 제사를 꼭 드리고자 함입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그 제사가 방해받지 않도록 종들에게, 이삭에게도 숨깁니다.
제 아들 하준이와 이 때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으로 제사를 떠날 때에, 아내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을 알렸을까? 아니면 숨겼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준이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사라의 남편으로서 당연이
아내에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하더라구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때로는 남편들이 아내가 모르게 고민하며 결단해야 하는,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을 잘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은 받은 후, 아브라함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것이 방해가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은,
예배가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 예배를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제거하면서 그 예배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위해서 아브라함은 그 긴 삼일 길을, 제사드리러
갔던 것입니다.
3.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요구하셨던 그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됩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를 그 위에 벌여 놓고, 아들까지 결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단 나무 위에 이삭을 올려 놓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미 그 마음속에서는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잡는 것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 대신에, 이미 준비하신 제물을 보여
주십니다. 뿔이 수풀에 걸려있는 수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대신 그 숫양을 잡아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이삭을 받으셨고, 아브라함을 받으셨고,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을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난 삼일 동안, 자신을 절망케 하는 하나님을 만날 걱정에
두려워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순종의 제사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이 땅에서도 예배드리러 가는 그 발걸음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기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아브라함과 같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고, 절망케 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기가 두려워서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제사드리러 가는 그 삼일길을 우리에게 있게 하십니다.
그것이 고통의 시간이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시고, 나를 죽이셔서 제물로
받으시고자 원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단을 쌓고, 그
분을 만나야 할 것을 결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고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하셨고 제사드리러 가는 삼일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 믿음의 사람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직접 치르셨습니다.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이 죽어야 할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짊어 지고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게 하셨고, 그 십자가 위에 올리시고 죽이셔서,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올라가신 아들 예수님을 보면서 절망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이 죽어있던 삼일을 지내시면서 오열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환경속에서 이 자리에 와 있던지, 설령 가장 귀한
아들을 드려야 하는 상황가운데 오셨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가장 귀하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귀한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드리러 가는 길, 예배드리러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을 드려서, 내 삶을 드려서, 산 제물로 삼을 수 있으시기를 바라며,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예배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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