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신과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가리켜서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빚진 자다."라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군가에게 빚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우리로 빚지게 한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께 빚진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성령께서 하신 일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죄에 권세가운데 갇혀서 죽음을 향하여 달리는 허무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명의 법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법을 따라서 영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숲 속에 사는 사슴이 사냥꾼이 놓은 올무에 잡혀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사슴의 발에 얽매인 올무를 풀어 해방시키고, 사슴이 다시 살 수 있도록 한 것과 같이, 성령님께서 죄인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생존하기를 관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들을 향하여서, 다른 좋은 표현을 놔두고 굳이 "우리가 빚진 자"라고 말할 때에의 의미는, 성도들은 성령님께 빚진 그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 빚진 것을 갚는 삶은, 성령님이 관심하듯이,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잘 살아남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영적인 생존을 끝까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관심하며, 오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 빚진 자들이 어떻게 영적으로 생존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먼저, 사도바울은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영이 죽지 않기 위해서,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영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육신적인 생존 본능이 있습니다. 낯설고 힘든 환경속에 처해지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그 환경과 싸우고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2000년에 개봉된 Cast Away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Fedex 직원인 척 놀랜드가 등장합니다. 척 놀랜드는 약혼녀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함께 하다가, 회사의 급한 호출을 받고, 말레이시아 행 화물 비행기를 탑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비행 중에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추락하고 놀랜드는 겨우 무인도에 도착합니다. 놀랜드는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바다 물고기와 게를 손수 잡아 먹고, 불을 피우기 위해 손에 피가 나도록 막대기를 비벼댑니다. 그리고 막대기를 비빌 때 난 손의 핏자국으로 배구공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놓고, 그것을 윌슨이라고 이름 붙이고 친구로 삼아 배구공과 대화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척 놀랜드는 어떻게 하면 그 무인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연구하고 노력하여서 결국 4년 만에 그 무인도에서 구출을 받게 됩니다.
척 놀랜드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육신의 생존을 위해,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해야 할 생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생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 수고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생존을 위해서 더욱 수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과 육신이 같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강력하게 경고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6절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이고, 하나는 영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가져오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내 육신적인 삶에 사로 집혀서 살아가는 생각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내 육신적인 삶을 만족케 하면서 살아갈까 관심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내 육신적인 만족에 관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 잡혀서 살다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고 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육신의 생각이 사람으로 죄를 행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는 영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몸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영이 관심하는 것은 내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에 관심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하고, 어떻게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관심은 영의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서로 대립적이고,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영으로 육신의 생각을 이기고,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내 육신의 생각과 소욕을 죽이면서 살 때에, 우리의 영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싸움을, 날마다 치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22-23절에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 안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고, 이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영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 가운데서 갈등하고, 싸우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인 거장으로 일컬어 지는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천국문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 어거스틴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어거스틴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문지기가 말하기를 "내가 보니 당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없고, 온통 철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어거스틴은 꿈에서 들은 문지기의 말에 놀라서 꿈을 깼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그 일로 이렇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 생각하리라"
성도는 날마다 영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면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 사이에서의 싸움이 없다면, 성자와 같이 온전히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을 완전히 다스리는 삶을 이미 살고 계시던지, 아니면 육신의 생각에 사로 잡혀서 영적인 것은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에 관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사도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의 영이 살게 됩니다.
2. 그리고 영적으로 살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당신들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종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의 영을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로 죄를 짓게 만들어서 죄에 얽매여 살아가게 만듭니다. 결국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성령의 법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됩니다.
1) 16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성령이 친히 증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어지는 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를 증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을 수 있도록 확증해 주신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22-23절에서,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그 안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은 자신의 죄성과 연약함을 보면서, 절망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저를 건져내 주십시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탄식은 건져 낼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를 건져 주실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믿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존재임을 증언하시며, 우리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부르짖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사는 사람이 영적인 생존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깨닫게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상속자는, 종의 영을 받은 이 땅의 상속자들과는 다릅니다. 종의 영을 받은 상속자들은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상속받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 땅에서 많은 기업을 소유하고,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고서 영광을 누리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상속자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물려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인도의 날라마람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께서 경험하신 일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한 인도 여인이 낡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참석하더랍니다. 그 선교사님의 눈에 그 여인의 낡고 더러운 옷차림, 성의 없어 보이는 옷차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옷이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런 곳을 입고 왔을까라는 언챦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그 여인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고, 여전히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왜 이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그러자 그 부인은 "이 옷은 제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선교사님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말합니다. "선교사님, 저도 이전에는 돈과 좋은 옷들과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제 재산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면 빼앗아간 모든 재산을 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재산을 다시 찾아서 부유하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합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상속자인데도, 종의 영을 받은 상속자와 같이 이 땅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로 삶을 채우려고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채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살게 됩니다.
영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땅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은,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받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종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고난받고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육신을 안위와 자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에 대해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위해서 그 고난을 당하셨듯이, 나도 예수님을 위해서 수고한다면 그것이 곧 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난을 받을 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영광의 모습이 더 커지고 있음을 깨닫고 귀하게 여기며,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께 빚진 자입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은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영이시고, 우리 믿는 자들이 영적으로 더욱 강건한 삶을 살아가기를 관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 빚을 갚는 삶은,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하게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생각과 몸의 행실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는 영적인 관심이 아니라, 육신적인 것에 빠져 있습니다. 육신을 신으로 삼아서 썩어질 육신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관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일 때에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며 의지하는 양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임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재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서의 고난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인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고난을 받으셨기에, 하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마시고, 도리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맞서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더욱 강건해 지셔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영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삿심으로, 성령님께 빚진 것을 날마다 갚아나가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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