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로,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원하시는 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벼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논에는
벼들이, 그리고 마당에는 포도나무를 비롯해서 여러 과일나무들이 심겨져 자라고 있었습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서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 해에는 얼마나 많은 추수를 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을에 추수를 할 때에 소출이 많으면 일이 많아도 힘들지 않고 도리어 힘이 납니다. 그런데 소출이 적으면 할 일은 적은데도 한숨이 나고 힘이 듭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는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일들을 통해서 좋은 결과,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시듯이,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풍성한 열매로 드려지는 삶을 기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은 어떠한 삶이고, 어떻게
그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열매가 많이 맺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심으셨습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대단한 과실수는 아닙니다. 나무는 가늘고 비비꼬여서 불쏘시개 외에는 쓸 수가 없고, 오로지 열매를 바라고 심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포도나무는 “생명의
풀”이라고 해서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포도는 “하나님의 구원과 풍요” 그리고 “기쁨과
치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풍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포도나무로 심으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포도나무로 심으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역시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에 보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쫗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편 80:8)
그리고 좋은 포도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면 열매가 시원치 않습니다.
이사야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시편이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극상품의 포도로 해서 심으시고, 좋은 열매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좋은 포도가 아니라 쓸데없는
들포도가 맺혔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포도원 농사를 잘못 지으신 것 같습니다. 농사 중에서 자식
농사가 가장 힘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거두고자
하셨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지만,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만한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셔서,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자
하십니다.
8절에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들이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도 열매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로 좋은 열매를
원하시는데, 세상의 거친 열매, 들포도를 맺어서 드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시는 농부의 마음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을
보면서, 정말 많은 열매를 거두시기 원하십니다.
2. 이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냥 포도나무도 아니고,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이라고 할 때 “알레디노스” 라고
합니다. 이는 ‘진실된True,
그리고 허사적인 것이 아닌 실제의 Real” 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 싶으셨던 열매를 실제로 얻으셨기에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열매를 맺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충분히 맺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열매 맺을 방법을,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가지를 접붙이는 농사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열매를 잘 맺고
좋은 나무에, 가지를 붙여서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나무에서 올라오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계명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행하셨던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성장, 죽음, 부활, 승천 등의 이 땅에서의 모든 시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였고, 그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절에 보면, “내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열매맺는 삶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가능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가 하나가 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같이 머무는데, 예수님은 통치자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제자로서의 모습으로 서로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면서 열매를 맺으셨듯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에 열매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있게
됩니다.
1) 먼저, 구하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신다니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구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구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셨습니다.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우셨습니다. 그래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면서까지 십자가를 거두어주시기를 간구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내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를 간구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성자 프란치스코의 집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 얼굴이 일그러져 험상 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프란치스코을 보고 부탁합니다. “지금 밖은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그 나병환자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병환자가 또 묻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나병환자가 또 다른 부탁을 합니다. “제 몸이 너무 추우니 당신의
알몸으로 저를 녹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의 차가운 몸을 녹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치스코가 일어나 보니 그 나병환자는 온데 간데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왔다가 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곧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 기도문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으로,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로,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으로 사용하여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으로, 어둠이 있는 곳에 빛으로,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으로 사용하여 주소서.
오 주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를 하며 살게 하소서.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신을 줌으로써 받으며 살게 하시고, 그리고 죽을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안에 거한다면 우리의 간구가 달라집니다. 나를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말씀과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문둥병과 같은 사람에게 내 집을 개방하고, 먹이고, 안아줄 수 있는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2) 그리고 우리의 기쁨의 근거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안에 거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기쁨의 근거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분이 나쁠 때
맛있는 것을 주면 기뻐합니다. 자녀를 기쁨의 근거로 삼거나, 돈을
기쁨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기쁘지만 그 돈을 잃은 사람은 슬픕니다. 시험이나 경쟁에서 좋은 성적은 거둔 사람은 기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슬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기쁨은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모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그랬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11-12절에, 제자들에게 기뻐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욕먹고 박해받고, 사람들이 거짓말과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도리어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받는 고난받는 것은 복되고 기쁜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자신이 잘 살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께는 궁극적인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이 달라집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내 뜻대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 하님을 떠나는
것보다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뭔가 손해보고 잘 안되면, 나도
주님을 위해서 이러한 손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었고,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에 결과를 말씀해 주십니다.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접붙임을 받는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과 말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에 그 가지를 잘라내셔서, 다른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시고, 그 열매로 영광을 받으시고자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고, 그 다스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다른 구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한 구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구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기뻐하는데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면 예수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때문에, 박해를 받고, 손해를 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도의 삶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많은 열매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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