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4/2018 - 성전을 헐라 [요한복음 2:13-22]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가 직접 육신의 예수님을 뵌적은 없지만, 말씀을 통해서 보았을 때에,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의 예수님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잘못된 일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채찍을 만들어서 그 행하는 일들을
강력하게 저지하실 정도로, 화를 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와졌을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일어났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기념절기입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있으면서 노예의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이스라엘을 세우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감사하고 기념하며 드리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 때에는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 절기 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광복절, 미국으로 말하면 독립기념일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각 나라의 국경일들은 그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그 정신을 잇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에서 가장 부각이 된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기념하여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을 뿐, 유월절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시적으로는 사람을 통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주권이 그
가운데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늘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그의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그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이 되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뜰 안에서 예수님을 분노케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전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지체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잘 세워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1. 먼저,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면서까지 분노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절기가 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님은 성전 안을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은 크게 네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전안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뜰이 처음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첫째 뜰까지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고,
여인의 뜰을 지나면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게 되면 성소와 지성소 건물이 있는 제사장의 뜰이 나옵니다. 각 뜰을 지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의 처음 뜰인, 이방인의 뜰을 들어가셨을 때에 본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장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 장사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도록 다 쫓아 버리십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감정에 휩싸여서 비이성적으로 하신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동물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시고, 동전이 올려진 상을 엎으셨으니
이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헐크와 같이 화가 나면 비이성적으로 날뛰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중에서도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라며 비둘기를
담은 상자를 부수지 않으십니다. 소나 양과 같은 짐승들이야 풀어놔도 다시 잡을 수 있지만, 비둘기를 가둔 새장을 쳐서 새가 날아가 버리면 대책이 없기에 이를 고려해서 하신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모습을 보시고 과격하게 반응하셨지만, 사람들이 성전안에서 소와 양, 비둘기 팔고 돈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제사짐승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키우던 짐승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지만, 멀리서부터 재물을 가지고 오기도
힘들고, 만약 가지고 오다가 짐승이 상하게 되면, 제물로 바칠 수 없었고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책임자되는 대제사장의 주도아래에서, 제물로 쓸 짐승들을 준비하고 이를 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동전을 바꾸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안에서는 성전안에서만 쓸 수 있는 화폐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제물을 사려면 일반적으로 사용된 로마화폐를 성전 화폐로 환전해야 했습니다. 원래 제사를 잘 드리라고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왜곡되어서 도리어 장사하는 일이 됐습니다. 성전은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리세를 받아들여 이윤을 챙겼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성전 관리자의 허락하에 성전을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제사의 편의를
도와 준다고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도리어 제사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고, 짐승들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전에, 이윤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2.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보시고,
채찍을 만드시고, 소란을 일으키시며 그 일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성전안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기억되고, 계속 이어져 가야 합니다. 유월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기억되는 곳이 성전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속죄짐승을 드림으로 죄용서 받는 구원의 장소가 성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간구가 이루어지는 곳이 성전이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1:13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6장에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어떠한 기도인지가
나와 있습니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역대하 6:21절에,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대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께 범죄하여 벌을 당할 때에 성전을 향하거나 성전에 와서 주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간구할 때, 그 기도를 들어달라고 솔로몬은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회개의 간구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죄사함과 구원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부모는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성전에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기도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왔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응답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안에 들어가셨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 기도보다는, 강도의 굴혈과 같이 되어버린 성전을 보시면서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이 성전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채찍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희안하게 여겼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보다는 채찍을 휘두르는 예수님의 모습이 더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묻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고
합니다. 이러한 소란까지 피우면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라고 하실 때에 그것은 지금의
성전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칼날같은 지적이고, 이제 그 성전이 헐어지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셨지만,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그 원래의 목적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 몇차례 무너진 역사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첫 번째 성전이 바벨론 침공 때에 무너졌습니다. 그 이후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와서, 스룹바벨의 주도로 두번째 성전이 작게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성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손을 통해서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세번째 성전이 헤롯에
의해 세워져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제 이 성전도 헐어야 할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헤롯은 로마황제에 의해 유다지역을 다스릴 왕으로 세운 받은 이후에 한 일이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통치를 쉽게 하고자 성전
건축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 46년간 몇 차례에 걸친 공사를 통해서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 헤롯왕이 지은 성전은 가장 크고 훌륭 했지만, 그 성전은 지어진 동기부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사람인 헤롯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구속의 은혜를 이어져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릴 유대인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정치적으로
세워진 성전은 결국 장사하는 집, 강도의 굴혈이 된 것입니다. 외형만
성전이었지, 그 내용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성전을 보면서,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삼일만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허물어 버려야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외형적인 모습은 있는데,
그 내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감격은 사라지고, 다른 생각과 감정으로 믿음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하지 않은 성전신앙의
모습은 허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도 허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익이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장사하는 자들과 같은 신앙의 태도도 허물어야
합니다. 그러한 동기를 가진 신앙은 흔들릴 수 밖에 없고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4. 이제 예수님은 헤롯의 성전이 헐어지더라도,
새로운 성전을 삼일 만에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로 된 성전이 아닙니다.
2:21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삼일 동안에 일으킬 성전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세워질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하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고,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육체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성전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의 몸이 되어서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는 성전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여 예배하고 주님을 높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우리의 죄가 고백되어지고 죄사함받는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의 섬김속에서 그러한 은혜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굴혈이되고, 장사하는 곳이 된 성전을 허시고 당신의 몸으로 구원을 이루셨고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그 일들이 선포되며 구원의 역사가, 그리고 기도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몸된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예배하며, 그의 말씀가운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며 주님의 구원을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지셨던 슬픔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라고 했을 때에 가지셨던 안타까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기억되고 지속되는 참된 성전이 세워지기를 그토록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사건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었을 때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전이 필요하고, 그 성전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 참된 성전을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그 몸으로 이루시고, 몸소 이 땅에 성전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셔서,
예수님의 몸으로서 성전의 일을 교회로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영혼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전을 성전되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성전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장사하는 자들과 같은 모습은
무너져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성전을 찾는 모습도 사라져야 합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의 감격으로 예배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회개하며 구원의 응답이 있는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기억되고, 또한 지금도 그 구원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성전, 교회가 세워질 수 있기를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보시면서, “그 성전을 헐라”라는 말을 듣는 교회가 아니라, “성전된 내 몸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고 칭찬받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감격, 그리고 그 역사를 지속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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