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5/2018 -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가복음 19:29-40] 종려주일
요즘 한국의
케이팝 가수들의 인기가 세계적입니다. ‘방탄 소년단’이라는
남성 아이돌 그룹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 빌보드차트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입니다. 이러한 가수들의 인기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타날 때에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공항이든, 거리든, 공연장이든 어디든지 간에 가수가 도착하면,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가수의 이름을 부르며 어쩔 줄 몰라합니다. 가수가 가는데로 그 뒤를 따라다니며, 손이라도 만져볼까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고 만져주기를 기다립니다. 악수라고
한번 한 사람은 까무러칠 정도로 좋아합니다.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됩니다. 마치 재 정신이
아닌,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와 흡사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서 흔들어 댑니다. 이번 주일이
종려주일인데, 이는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할 때에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환호하는 무리들을 저지하지 않으시고 그냥 두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아주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 환영인파로 인해서 기분이 좋으셔서, 좀 더 즐기시려고 그냥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 당신을 환영하는 무리들 중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사람들이 있음도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증거되어야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환영하며 소리지르는 무리를 그냥 두십니다. 반면에, 그 많은 환영 인파중에서,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지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비판적인 모습으로 말합니다. “선생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소란스럽게 맞이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못 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무리들의 행동이 무지하고
무책임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를 향해 자신들의 왕이라고 소란을 피우며 맞이하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이를 보고서 위협을 느껴서 이스라엘을 탄압할 수도 있을텐데, 그들은
그러한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청년인 예수를 자신들의 메시야로 여긴다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행동이 책망받을 일이니,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환영하는 것은 누군가는 해야 할 마땅한 일이고, 사람이 아니라면 돌들이라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 말씀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만약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기 위해서 소리를 지를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10절에 보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돌로 쳐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인의 죄에 대해서 땅에 흘려진 아벨의 피가 부르짖어, 가인의
죄를 하나님께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모습 속에서, 돌들이
소리를 지르며 고소를 할 만한, 마땅치 않은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또한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의 외침소리를 들으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외침을 그냥 두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선포가 그들의 외침과 행동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모습이 이 땅에도 드러내며 알려지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하지
아니하고, 이 땅에 증거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사람들의 진정한 왕으로서 드러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2:13절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보면서, 예수님이 그들의 왕임을 공포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를 꺽으시고, 죄인된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우리의 왕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통 세상의 왕과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왕이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에는 위용있는 말을 타고, 사람들을 압도하며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고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낮추셔야만 하셨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을텐데, 이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귀 새끼 등에
올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나귀를 타고 나타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이심을 확실히 드러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옛날 선지자 스가랴의 메시야의 예언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당신의 겸손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와 같이 주인이 자신에게 짊어지는
짐을 묵묵히 지고가는 낮아짐의 모습이 예수님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정도까지 낮추셨는지
빌립보서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왕, 메시야가 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증명됩니다. 낮아졌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한다면 자신을 낮추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감당하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낮아지셔서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깨달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은 겸손의 왕뿐만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사람들에게 외쳐지길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난 한 찬양의 내용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이 목자에게 나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늘의 천사들도, 땅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보고,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오심과 평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메시야가 오시면,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에, 메시야 왕국에 대해서 묘사하기를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는다고 했습니다. 암소와 곰은
함께 먹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곰이 암소를 잡아 먹기 위해 달려 들 것이고, 암소도 이에 저항해 보거나 도망갈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으며 노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독사는 아이의 손을 물어서 죽일 것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서도 가장 싫고 무서운 동물이 뱀입니다. 징그럽습니다. 꿈틀거리는 독사들과 함께 논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주실 화평은 그것들이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독을 어린아이의 손을 향하여서
뿜지도 않습니다. 풀을 함께 먹으며 서로 함께 어울려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평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10절에, “내가 예루살렘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이방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속에서도 그 연관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루’는 ‘터, 기초’라는 뜻이고, ‘살렘’은
히브리 단어에서 평화라는 ‘샬롬’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 평화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루어질 화평은 예루살렘이 강해져서 다른 이방민족들의 병거를 부수고 활을 꺽어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킴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예루살렘의 병거와 말, 그리고 활을 끊고 화평을 이루고, 이를 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평화를 제안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먼저 무기를 내려 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서부
영화를 볼 때에 긴장되는 장면이 종종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이제 서로 싸움을 그만 두자고 제안하면서, 그 표시로 서로의 총을 내려 놓을 때입니다. 싸움을 중단하자고 했지만, 자신의 공격무기를 내려 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눈을 뚫어져라
눈치를 보면서 총을 서서히 땅에 내려 놓습니다. 그 때 배경음악으로는 아주 긴장된 음악을 틀어 줍니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총을 들어 자신을 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상대방의
행동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총을 내려 놓습니다. 우리가 서로
화평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먼저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지만, 진정한
화평은 내 손에 단단히 붙들고 있는 창과 활을 꺾고, 그 손을 펴서 상대방을 안아줄 때에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서 칼과 창을 들어 싸우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서 그의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진정한 평화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람과 사람들을 갈등하고 대립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죄성으로 인해서 서로 미워하며
싸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신 분으로 외쳐지고, 그렇게 알려 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당신을 향해 겸손의 메시야를 보고, 평화를 줄
것으로 믿고서 외치는 그 사람들의 외침을 용납하셨고, 도리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3.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구원자로 드러낼 외침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겸손하신 왕이시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더 큰 외침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메셨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왔고, 구원을 가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유과 겸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낮아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으려,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겸손하여 주님께 순종하며,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낮출
때에 메시야인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온유하며
화평을 만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내 손에 쥐어진 칼과 창을 꺾고, 그 손을 펴서 상대방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메시야인
예수님의 모습이었고, 예수님은 우리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마태복음 3:9절에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우리는 돌을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땅히 외쳐할 것을 외치지 못하면 돌들이 외칠 것이고, 세례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대신에,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돌들의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의 몫인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돌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마땅히 외쳐야 할 것을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것들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구세주요, 나의 왕”이라고 외쳤던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증거하는 이들을 잠잠하게 하려는 많은 의도와 시도들이 있는 사회로 변했습니다. 정부와 학교등의 공식적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길가의 돌과 같이 잠잠한 존재로 남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이 겸손과 온유함으로 이루신 구원의 역사가
증거되기를 원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가장 큰 외침은, 우리의 왕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그의 강함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유하고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과 온유함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그 때에 우리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구원의 일들이, 우리 가정과 교회, 이 사회가운데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돌들이 할 수 없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허락하신 강한 외침이 있는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