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에서 시청률이 30%를 웃도는 인기있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유혹”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남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고 물에 빠뜨리고 아내가 죽은 줄 알고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죽지 않고 살아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물로 변장해서 남편을 유혹하며 접근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해서 남편을 속이고 복수를 할 수 있을까에 관심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변신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성형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본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상항 화장을 하거나 이상한 복장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왼쪽 눈 밑에 점을
찍고 나와서,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도
남편과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잘도 속아 넘어가고, 아내의 복수는 성공하게 됩니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점하나 찍었다고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까 이해할 수 없고, 그 모습이 우스워보이기는 했지만, 연기자들의 능청연기를 보면서 시청자들도 함께 속아가며 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생긴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두명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 잘 알았기에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와서, 무슨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런데, 두 제자에게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그 사람은,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 본 것만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20:14절에 보면,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나타났고, 그
이후에 예수께서 마리아 뒤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몸을 돌려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지만 마리아는
그 분이 예수님 이신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8:17절에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을 뵙게 되는데,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몸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새롭게 입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 어떠한 몸으로 부활할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며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죽은 몸을 태우고 그 가루를 물에 뿌리면 그 몸이 부활할 때에 형태가 없어져서 어떻게 부활하냐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화장을 안하고 시신을 땅에 묻어도 그 몸이 썩어서 그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할 때의 몸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육신의 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몸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에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몸을 주셨다고 한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영생을 살아갈 수 있는 부활의 몸을 허락해 주십니다. 두 제자앞에 나타난 예수님도 부활의 새로운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활의 몸이 그 전의 몸과 다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그 전 몸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잘 생겨졌다거나 키가 커져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리어져서’의 헬라어는 ‘크라테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무엇인가에 붙잡히다. 얽매여 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어서,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동행하심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이 크게 변화됩니다. 슬픔과 역경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면 도리어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믿음생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동행을 알지 못하면, 오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기가 쉽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눈이 가리어지면 그 분의 동행을 깨닫지 못하는 슬픔과 절망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을 경험하며,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제자들의 눈을 가리어졌다고
했을 때에 그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가리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눈이 가리어진 이유는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했습니다. 곧 그
말은, 자신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이기를 바랬지만, 결국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게 된 이유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한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시면 안 됐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판에 어떻게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야가 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마음이 그 제자들의 눈을 가리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 제자들의 마음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주님, 이 일들이 당신에게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는 모습은 메시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일이 일어난지가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죽으신지 사흘이 되었으니, 그
죽으심도 확실하고, 더 이상 구원의 소망이 없다고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행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슬퍼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인간적인 생각에 붙들려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한다면, 그렇게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신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이유가, 도리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어야 되는 이유가 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눈이 가리어져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에 대해서 말한 것들을 26절에 말씀하십니다. 26절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두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의 사형 판결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도리어 그 모습이 ‘선지자가 말한 메시야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년전에, 이사야 53:5절에 메시야에 대해서 이사야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메시야는 이 땅에 오셔서 찔림받고, 상함받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음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두 제자가 본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확실한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부활하신 참 메시야인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는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이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손에 못 자국과 허리에 창자국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고, 그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지금 영광 중에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이 예수님을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곁에 계신다고 할지라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이 예수님의 존재와 그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눈이 가리어 져서, 결코 그 분을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비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두 제자와 같이,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책망 받는 제자의 모습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또 다른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그
떡을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길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메시야에 관한 선지자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을 가리고 있었던 무지함과 불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녹아 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과 함께 저녁에 음식을 나누며 떡을 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들어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제자는 그 떡을 먹음으로 그 눈이 열리게 되고, 자신을 위해서 죽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을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주님께서 살아나셨으며,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슬픔가운데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동행을 깨닫고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해서
증거하러 갔던 것과 같이, 우리로 예수님을 동행을 믿고 살아가는 기쁨과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에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믿지 못해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육신의 눈을 뜨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에, 그 눈이 가리어져 동행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못 알아 본다고 꾸짖거나 증명해 보이시려고
애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떡을 주셨을 때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제서야
예수님의 동행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기에, 예수님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일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며, 그 말씀을 믿고 행할 때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지금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봐야지 그분의 살아계심과 동행하심을 믿겠다고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에, 우리를 가리고 있던 의심이 걷히게 되고,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서, 주님을 만나고 교통하는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대할 때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고, 어떠한 슬픔과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소망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한 성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 주님의 동행하심을
수시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눈이 밝아진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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