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일서 4:15-21, “사랑이 우리안에 거하시면…”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다는 믿음의 내용이
하나 더 추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까지도 가져
옵니다.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고,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거한다.” 는 말은 희랍어로 “메노”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뜻은
“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거하게 되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곧 하나님과 동거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누구 거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한국 고전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구려에 평원이라는 왕에게는 평강이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너무 울어서 별명이 ‘울보평강’이었습니다.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울때마다 울음을 그치게 할 요령으로 말하기를 “그렇게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낼거야”라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에 평강공주는 아버지가 말한 대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겠다고 고집을 피우게 되어서,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의 집에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달이라는
바보가 사는 집에, 평강이라는 공주가 와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평강 공주는
자신의 남편인 온달에게 글을 가르치고, 무예를 가르쳐서 무사가 되도록 만듭니다. 후에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에 온달은 전투에 출전해서 큰 공을 올리게 되고, 왕의 사위로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여인과
함께 거하게 되니까 바보도 변화됩니다. 우리가 함께 동거하는 사람에 따라서 삶이 변화됩니다. 늘 집안을 지저분하게 했던 사람의 집에 깔끔한 사람이 와서 함께 살게 되면 누군가에게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집안이 깔끔해 지던지, 아니면 깔끔하던 사람이 지저분하게 되던지
말입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 살아도 그 영향력이 대단한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거하시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동거하실 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동거한다는 것은, 곧 서로 사랑의 관계가 됨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나타나는 변화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비로서 진정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9절에
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안에 ‘훅’하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한국 말에, 너무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에, “그것에 빠져 산다.”라는 말을 합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말하기는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푹
빠져산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꽁깍지가 끼었다.”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돈에 빠져 산다.”라고 하고,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일에 빠져 산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게임에 빠져 사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떠한 것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빠져서 삽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안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게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께
빠져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거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되어져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도, 그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해 드리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빠져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고 계실 정도로, 우리의 모든 것을 관심하시며 사랑에 빠져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자꾸 죽어가니까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우리 안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 우리를 점령당하지 않도록, 더욱 더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드리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우리 안에 사랑의 하나님이 거하실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 심판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계를 재패했던 대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강력한 적군앞에는 강했는데 어두움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투우사인 세자르 린콘은 황소와 맞서서는 용감했지만 쥐는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교회 강단을 보면 꽃꽂이하시는 분들을 보면 꽃들을 참 좋아하시는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벳스 1세는 Anthophobia 라는 꽃 공포증이 있어서 꽃을 보면 좋은 것이 아니라 두려워했습니다. 개인들마다 두려워하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그 대상들이 자신을 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옵니다. 하지만
반대로 두려움에 대상이 나를 사랑한다고 깨닫게 되면 두렵지 않고 도리어 서로에 대해 담대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죽음일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청객과 같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그런데
그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뒤에 있을 심판 날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 뒤에 있는 심판에 관한 것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았던 내용들을 근거로
해서 심판하셔서, 그 죄에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해도,
죄없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엄중하신 심판대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심판날의 두려움을 이기고, 도리어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되면,
심판날에도 담대하게 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심판대를 설 때에 담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재판관 앞에 서면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위축되고 두렵기 마련입니다. 몇 년 전에 차를 몰고서 가족과 여행하면서 아리조나 지역을 밤에 지나게
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니 빨리 목적지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가는 길이고 밤길이라서 조심스럽게 운전했습니다. 그렇게 언덕으로 난 오르막 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는데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었습니다. 그래도 속도를 조절하면서 가는데 갑자기 왼쪽
후미진 곳에서 경찰차가 불을 키더니 제 뒤를 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러 과속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혹시나 내가 실수를 저질렀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경찰을 기다리는데 제 심장이 막
요동하더라구요. 경찰이 와서 저에게 ‘왜 차를 세웠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고?’고 묻더라구요. ‘모른다.’고 했더니, 제 차의 헤드라이트 하나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에 주행할 때에 위험하니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세웠답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죄를 짓고, 실수를 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의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은 불안하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담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심판 받을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행하신 일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음을 믿기에,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자 그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을 감사와 감격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서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 쫓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충만할 때에, 우리는 죄로 인한 정죄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인한 담대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며,
심판대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이제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때에 생기는 또 다른
변화는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을 때에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형제를 사랑함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지 아닌지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형제 사랑의 계명을 주께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7-40절에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랑으로 거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형제, 이웃, 내 배우자, 자녀, 부모,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듯이, 형제와 이웃이 우리의 몸과
같이 여겨질 정도로 친밀한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가까와 집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사탄의
도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를 가깝게 하지만, 사탄은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동거를 방해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방해합니다. 또한 형제,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벌려 놓습니다. 자꾸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마음과 뜻을 다해, 목숨을 걸고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끌리고 감정이 끌리는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온맘과 온힘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때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내가
하나님안에 거하듯이, 이제 형제가 이웃이 나와 한 몸인 것처럼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국 가요 중에서 가사를 들으면서 공감된 노래가 있었습니다. 박원이라는 가수의 ‘노력’이라는
노래입니다.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면서 그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과 고민을
담은 가사입니다. “널 만날 수 있는 날 친굴 만났고, 끊이지
않던 대화가 이젠 끊기고, 널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을 겹쳐봤어, 누군가
내 안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사랑한단 말은 점점 미안하고, 억지로
한 것뿐인데 넌 좋아하고, 너에게만 나는 아주바쁜 사람, 내
연락을 기다리다가 또 잠들겠지, 나도 노력해 봤어 우리의 이 사랑을 안되는 꿈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처럼, 사랑을 노력한다는게 말이 되니, 말이 되니…” “사랑을 노력한다는게
말이 되니”라는 가사를 보면서 그 말에 동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그러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는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웃에 대한 사랑도, 단순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뜻을
맞추고 의지적으로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신 성도들의 사랑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힘을 다해
사랑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실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심판날에 정죄하지 않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돌아가게 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날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랑으로 거하시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 사랑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우리 안에 거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또한 사람들이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갈라 놓는 일에 분주합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늘
여호와 하나님께 내 삶의 자리에 모셔 드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된
삶, 심판의 날을 담대하게 맞을 수 있는 구원의 확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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