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은 어린이주일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자녀가 잘 되는 법’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한국 경향신문에서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 분야에 걸친 삶의 만족도를 조사한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 등과 같은 사회생활에 만족하냐는 물음에, ‘만족한다’는 32.8%, ‘보통이다’는 42.9%, ‘만족하지 않는다.’는 18.4%, 나머지는 무응답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통계중에서
하나가 가정에 대한 만족도입니다. “가정 생활에 대해 만족하냐?”라는
질문에, 53.2%가 ‘만족한다.’라고 답했고, ‘보통이다.’는 36.4%, ‘만족하지 않는다.’는
10.1퍼샌트로 나와습니다. 절반 정도만이 가족생활에 만족하지만, 절반은 만족하지 못한 가운데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 대한 만족도는 이혼률의 모습을 보아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2016년에 결혼과 이혼에 관한 통계가 있었는데, 한해동안 28만 1천 쌍이 결혼했고, 10만 7천여 건의 이혼이 있었다고 합니다. 3쌍중 한 쌍이 이혼을 한 꼴이
됩니다. 이혼하는 부부가 가정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혼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자녀들이 가정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부부를 이룸으로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가정에서 출생한 남녀가 만나서, “우리 서로 사랑하며
가족하자”고 결단하고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더욱 힘든 관계속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세워지기 위해서 각자의 역할이 있지만, 특별히 부모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보았듯이, 성경에서는
부모를 가정에서 아주 중요하고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또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자녀가 잘되는 길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부부가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면 저절로 자녀들의 한결같은 공경과
지지를 받을 만큼 완벽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가정안에서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법까지 세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이어서라기 보다, 그 권위를 가지고서 가정안에서 꼭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께서
부모를 자녀에게 공경받고, 자녀의 순종을 받아야 할 존재로 세워주셔서,
이루시고자 하는 가정은 어떠한 모습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부모는 우리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 되어야 할지를 알아야 하고, 이를 세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들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가정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모습이 부부들간에도 다르고, 자녀들이 원하는 모습과도
달라서 그것이 도리어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몇년 전에 유행했던 줄임말 중에 ‘엄친아’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뜻은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들 앞에서 그
자녀가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서, 그 예로 드는 사람이, “엄마
친구의 아들” 입니다. ‘엄마 친구의 아들은 말이야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지 몰라.” 그 ‘엄친아’가 자녀의 기준이 되어서,
남의 자녀들을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의 상이 있습니다. ‘누구네 엄마 아빠는 이런데, 엄마 아빠는 왜 그래?’라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부모나 자녀나 각자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올바른 가정의 모습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보실 때에
얼마나 만족하실까를 관심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과제중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남녀가 만나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우연이나 남녀간의 의지로 보기 쉽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6절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 부부가 된 다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주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가정 이루라고 남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갖게 된 것도 부부가
계획해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7:3절에 보면,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고 계획할 때, 내가 원한다고 다 자녀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이를 가졌어도 내가 원하는 아이를 만들어서 낳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나올지, 딸이 나올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시는대로 그냥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만드신 분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뜻이 있어서, 이러한 가정을 주셨을 지를 관심해야 하는 것이 부모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내가 원하는
가정이 아니라, 내 배우자를 짝지어 주시고, 자녀들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2. 그러기에 부모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가족하는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 모두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만드시고, 자녀를 만드시고 우리로 가족되게 하신 우리 가정의 핵심 멤버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과 가족의 관계를 잘 맺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족하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사람을 두셨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으로
잘 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를 방해합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불신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 그런데 그렇지 않아. 그 선악과일을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거야…”라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의 가족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족하기를 실패하게 되니까, 육신의 가족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있는 아담이 보기 안스러우셔서,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때에 하와를 보면서 감탄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곧 자신과 하나의 몸이라며
그렇게 좋아했는데,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하나님과 하와의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형제의 관계속에서도 사탄은 서로 가족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가 아니라,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서 시기하여 동생을 들판에서 돌로 쳐 죽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시기를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셨고, 가인은 하나님께 시치미를 떼며 이렇게 댓구합니다.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정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형으로서 동생에게 해야 할 역할도 망각하게 만듭니다. 형이 동생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도리어 동생을 시기해서 죽이는 일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가정에서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아버지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참된 가정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3.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안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관심되어지고, 교육되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6: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가정안에서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의 방법은 ‘주의 교훈과 훈계’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가 쓰여질 당시에 ‘교훈과
훈계’라는 것은 자유시민이 되는데 필요한 배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와 자유시민이 있었는데, 노예에게는 ‘교훈’으로 양육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이 시키는 일들을 그저
순종하고 따라했으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시민으로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이 교훈이었습니다. 교훈은 ‘파이데이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시민으로서 어떤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 사회에
합당한 인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계라는 것은 ‘누떼시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실제로 그 교훈대로 살아가는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교훈과 훈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행해야 할 양육 방법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분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 나오는 민족인 유대민족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 부모들이 다른 민족보다 똑똑해서 그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 주어서
그러한 인물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교육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가정 교육은 철저한데, 가정
교육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쉐마’교육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라는 뜻인데, 부모는 세상의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그것을 행하도록 훈련합니다. 신명기 6: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떄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신 것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교훈이나, 사람의 말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를 통해서 듣도록 하기 위해서 인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자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그 말씀을 듣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말로 듣는 것이 아닌, 그 부모의 삶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적인 부모들은 세상적인 지식과 정보를 자녀들에게 들려주고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믿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후원하고 격려하는 부모인 것입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만을 놓고 보면, 자녀들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부모가 자녀들 비위를 잘 맞춰주어야 하는 의미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3.21절의
말씀을 보면 이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하였습니다. 부모의 역할 중에서 하나가 자녀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힘들고 낙심된 일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가정안에
들어올 때에 부모로 부터 격려와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가정안에서 자녀를 낙심케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때로 부모가 자녀를 양육한다고 하면서 정죄하고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 “엄마 아빠가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말하지만, 자녀들은 그러한 부모의 말과 행동으로, 노여워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아빠의 위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나는 두 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나와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나는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 다리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4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하나님은 가정안에 자녀를 향한 부모의 격려와 위로가 있는 곳이기를 원하십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유대인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곳에 직접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손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손이 가는 것이며,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세상적인 가치와 성공을 대변하는 대변자로 자녀에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 삶을 보여 주도록 부모님들을 우리 가정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보내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살아가도록 양육하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에게 허락하신 절대적인 권위를 돌아보면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고, 부모님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며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각 믿음의 가정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족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날마다 성정할 수
있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