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지게 되는 믿음 중에서 하나가 천국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만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존재라면 지금 이곳에 이렇게 모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있는 것은, 우리가
죽게된 이후에도, 육신은 이 땅에 묻히지만,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생을 살아간다는 믿음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늘 관심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국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수차례
알려 주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다가 보니,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과제 중에서 하나는 이 세상과 더불어 천국을 소망하는 균형잡힌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천국을 혼인잔치와 그 잔치를 배설한 임금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들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혼인 잔치 때일 것입니다. 혼인잔치는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말합니다.
천국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혼 당사자들에게도 그 날은 기쁘고 복되지만, 결혼하는 아들을 위해서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아버지 임금에게도 혼인잔치는 커다란 기쁨일 것입니다. 또한 왕자의 결혼식은 그 나라 백성들의 관심이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결혼한 왕자가 앞으로 자신들의 왕이 될 것이고, 그 신부가 자신들의
왕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단순히 임금 가족의 즐거움일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관심이고 즐거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혼식도 짧지 않습니다. 보통 유대풍습에 결혼식을 7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임금이 베푼 아들의 혼인잔치라고 한다면, 어떠한 것 하나
부족함이 없이 풍성하고 기쁨 가운데 성대하게 준비되었을 것이 뻔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특권이라고 여기며, 그 기쁨에 동참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혼인잔치와 연관해서 말씀하셨을 때에 나름대로
천국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게 되면, 혼인잔치와 같이 노래로 흥을 돋우고 춤을 추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포도주잔을 들고 축배를 하며, 기뻐하고
축복하는 행복한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결혼잔치를
베풀어서 모든 사람들이 정말 기쁘고 행복한 결혼식의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임금이 베푼 커다란 혼인잔치와 관련해서
일어난 실망스럽고 살벌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잔치에서 쫓겨나 이를 갈며 분노하기도 하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실 때에, 천국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이 비유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임금ㅇ으로부터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임금이 베푼 혼인잔치에서 그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초대를 받았지만, 그 초대장을 받아들고 기뻐하며,
그 잔치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그 기쁨 가운데 있는지를 살펴보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어떠한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해서 살아갈 때입니다. 임금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초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금에게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임금은 종들을 보내서 정중하게 그들을 혼인잔치에 초대합니다. 임금의
첫번째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임금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오기를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들을 좀 더 보냈습니다. 그렇게 종들을 더 보냈다는 것은 강압적으로 그들을 오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상대방에 대해서 존경의 표시를 위해서 사람들을 더 보내서 그 초대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임금께서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오찬을 준비했으니 와 줄 것을 요청합니다. 가장
정중하게 한 임금이 이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더 냉냉합니다.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임금을 아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계획한 대로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그리고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 임금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은 단순히 임금이 베푼 잔치의 음식과 즐거움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그들이 거부한 것은 임금과의 관계입니다. 임금은
그들과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해서 종들을 보내면서까지 그들을 초대했는데, 그들의 모습은 임금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잔치를 초대한 사람으로서는 아주 모욕적이고 화가 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임금의 혼인잔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다른 이들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천국의
자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다른 민족보다 특별히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관심하기
보다는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와 자신들의 관심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엉뚱한 길로 갔던 것입니다. 천국의 즐거움은 어떠한 것을 먹고 마시는 배부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천국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실 정도의 친밀한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실 정도의 친밀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천국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어서 결국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 교인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과
먹고 마시는 인격적인 관계없이 살아가는 교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천국의 모습이 이 땅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경험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사람이나 일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를 위해서 살아가기 보다는, 나의 일, 나의 계획에 빠져서 하나님의 초대를 불응하다가 천국을
잃어 버립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업이
잘되고,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권세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다가 진정한 천국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그곳이 아무리 풍성하고 즐거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또한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어떤 이는 임금의 종들을 잡아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이에 노해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도록 만듭니다. 임금의 이러한 반응은 참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한 사람들이 그 초대를 거부하고, 종들을 죽였다고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혼인잔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도리어 종들도 죽고, 또한 초대받았던 사람들도 죽어서 장례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천국이 혼인잔치와 같은 즐거움이 아니라, 도리어
장례식 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천국의 초대를 거부한 자들이 경험해야 할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사업이 잘 되고, 밭에
풍성한 수확물들이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세상적인 만족과 즐거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삶이 어떠한 삶이었든지 간에 천국에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생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예수님은 임금의 두번째 초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복을 입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처음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을 때에,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종에게 명령합니다.
“길거기로 가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혼인잔치에 청해서 데리고 오라” 고합니다. 임금은 누구든지 데리고 와서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21에는 길가에서
종들이 나가서 초대해 온 사람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죄인들로 생각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초대받았던 사람들과 같이 잘 살고,
능력있고, 권세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과
비교할 때에 자격이 없어 보이는, 임금과 함께 잔치상을 겸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임금의 잔치자리를 가득
메운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면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기준을 두셔서, 선한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신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혼인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아서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횡재냐하며 잔치에 들어와서 왕이 베푼 음식에 놀라고, 음악과
춤등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혼인잔치의 모습이 갖추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인잔치는 그 즐거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우울하고 비참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임금이 그 혼인잔치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그것도 손과 발을 묶어 어두운 곳에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길거리에서 온 사람들은 혼인예식을 오기위해서 준비되어 온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자기 볼일 보러 바쁘게 갇다가 임금의 종들이 초대를 하니까 그것에 응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장에 가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화장도 안하고 민낯으로 장보러
가다가 온 여인도 있고, 학교 가다가 온 학생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밥먹으러 나왔다가 임금이 초대한다는 말에, 오늘은 참 재수도 좋다며 온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한명도 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바쁘게 가단 자신들의 발걸음을 돌이켜서 임금에 초대에 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하나님의 천국을 누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나라의 왕을 대면할 만한 자격이나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임금이 하객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임금을 대면하기에 합당한 옷, 예복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임금이 직접 준비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초대된 사람들이 예복을
준비했을리는 만무했으니 말입니다. 임금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죄가 많고,
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복만 입으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예복을 봐서 이제 임금과 함께 먹고 마실만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예복의 특징은 예복을 입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가리워 준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려 줍니다. 죄인인지 선인인지를 가려 줍니다. 내 부족함도 가리지만, 나의 업적과 잘난 것들도 가려주는 것이 예복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복을 입으면, 이 이 사람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복은 임금의 초대장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는 이 예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사람들에게 주신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구세주라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곧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복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를 드릴 때에 대부분 목사 가운을 입습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예복입니다. 제가 가운을 입는 것이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집례하는 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저의 모습을 이 예복으로
가려주심을 믿고 이를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저와 같이 부족하고 죄된 존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예복을 입음으로 어떤 이들보다 부족하고 더러운 존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해 주셨음을 믿기에 이 예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입니다. 밭을 많이 가지고, 사업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천국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만이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쉬운 방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예복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혼인잔치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임금에 눈에 임금이 하사한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을 입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은 그 사람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룹니다. 사환들에게 시켜서,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고 말합니다. 잔치자리에서 그냥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손발을 묶어 내 던지라고 합니다. 손발을 묶었으니 그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의 끝이 죽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천국의 비유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의 잔치를 누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가 마음껏 먹고 마시고, 눌릴
것이 풍성한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의 임금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살아간다면 천국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회를 뿌리치고, 밭으로 그리고
사업장으로 가는 것을 우선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적인 풍요와 기쁨은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진정한 천국의 삶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자기 볼일 보로 길을 나섰던 사람이라도 임금의 초대에 응해서 예복을 입고, 임금께 나온다면 천국에 들어갈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기쁨을 말씀해 주시기 보다는, 그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에 경험하게 될 슬픔과 죽음의 모습을 말씀해 주시면서, 천국에 대해서 더욱 소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생활이
늘 천국인 것은 아닙니다. 그 천국의 참된 기쁨과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잃어 버리게 되는 이유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세상에 모든 이들이 천국을 이야기하고 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은 밭을 사고 사업을 잘하고, 풍요하고
편하게 잘살게 되면 그것이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대와 교제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종종 그러한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교제로 들어오지 않고, 그 초대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천국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밭으로
가고, 사업으로 감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때로는
사업을 접어두고, 밭을 미루어 두고,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뒤로 미루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예복을
생각할 때에, 아무 자격도 없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초대를 받고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짜로 영화티켓을 받아도 그것을 좋아하고 감사해 하는데,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살아갈 천국의 예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저 받았는데,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친밀해 지심으로,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마음 껏 누릴
수 있기를 원하며, 또한 이를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장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도 잘 감당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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