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은 선교주일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일년에 한번 선교주일 정하여 선교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교회에서 선교하는 분들을 알려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헌금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오늘 선교주일과 관련해서 요나서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이스라엘
사람,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 성읍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심해서, 사십일 후에 멸망시키려고 하시니, 그들에게
이를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 있는 성읍이 아니라,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로 말하면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신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고난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열심을 내기 마련인데, 요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신 니느웨로 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라고 하는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나를 끌어다가 니느웨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멸망의 경고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도 요나는 충성스러운 모습은 하나도 없이, 죽지 못해 억지로 합니다. 니느웨성이 삼일길을 다녀야 하는 큰 성읍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동안
돌아다니면서 대충대충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합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나가
처한 상황은 다른 선지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니느웨 성읍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보내심을 받았기에 자신의 나라가 망하면 안되니까 죽기 살기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적대국이었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꼭 망하기를 원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사십일만에 그들의 죄로 망하게 하신다고 계획하셨으니, 요나가 그곳에 가지 않으면 그냥 멸망할 것이 뻔하니, 차라리 가지
않는게 낫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나가 염려하는 것은 괜히 자기가 니느웨성에 가서 멸망의
경고를 했다가 그들이 혹시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살려 주실 것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그토록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또 그렇게 성의없게 선지자의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바램과는 다르게 니느웨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 요나는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서 성을 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요나의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성을 냈지만, 이러한
모습은 요나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 전체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나라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고, 이것이 이땅의 온 나라와 백성들을 관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갈등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먼저
부르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요나와 같은 성냄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왜곡하는 신앙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요나의 성냄이 옳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도 임하는 것에 대해 성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성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자신들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의
그들에게 예고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성을 냅니다. “하나님 제가 고국에 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화가나 죽겠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나으니,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십시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많으셔서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기 보다,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분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을 낼 일이 아니라, 감사해
해야 할 일이 마땅합니다. 사실 요나가 지금 살아서 성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인내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간것은 죽을 죄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요나가 바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큰 물고기를
준비해 주시고,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감사한데, 니느웨사람들에게 베푼 은혜와 자비에는 요나가 크게 성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은혜와 자비는 좋지만, 나와 대적의 관계속에서 있는 사람에게 향한 은혜와 자비는
싫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요나가 이렇게 성을 내며 반응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비롯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와 자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민족보다 먼저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미워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은혜와 자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커다란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진 큰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2:3절에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민족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그것은 자신들만 복받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다른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와 자비, 인내와 용서를 이스라엘에게 먼저 보여 주셨고, 이제 다른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 인내와 용서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나와 같이 자신들만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살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경험한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용서와
구원의 하나님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에 가기
전에,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구원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맞아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셔서, 니느웨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아비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당신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구원하심을
받고 그것을 증거하며 사는 대표적인 분들이 선교사들입니다. 고국이 아닌 타국안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선포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후원하는 선교사님 중에 박안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중국에서 선교하시면서 기독교 지도자를 훈련시키시는 일로 선교하십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선교를 하시다가 몸이 안좋으셔서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받으셨는데 몸에 여러곳에 병이 나셨습니다. 몸에
암도 있어서 이번에 치료를 받으시는 중에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 할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 혼자의 몸으로, 몸까지 상하도록 왜 그곳에서
선교할 필요가 있겠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은혜가 다른 이들에게도 증거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은 나만 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고, 그분을 세상에 증거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을 전하지 못하겠다고 불평하고 성을 낼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2. 요나가 하나님께 성내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성을 내는 일이 생깁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백성을 하나님께서 멸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그들의 멸망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보기에 딱 좋은 성읍의 동쪽편 언덕에 초막을 짓고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합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철없어 보일지 알만합니다. 죽을 죄를 지은 자신을 살려 주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도 살리시고자
하시는데 그것을 싫어해서 성내고, 멸망받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말입니다.
이러한 철없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요나가
싫어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몇가지를 준비하십니다.
먼저 박넝쿨을 요나에게 예비해 주십니다.
박넝쿨이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줘서 니느웨성을 보는데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박넝쿨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요나가 그 동안 불만스럽고, 성질만
내다가 처음으로 기뻐했던 것, 그것도 크게 기뻐했던 것은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박넝쿨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박넝쿨만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에는 벌레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어 박넝쿨이 시들게 하십니다. 요나가 그렇게 기뻐하던 박넝쿨의 그늘이 사라져서 뜨거운 햇볕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셔서 불게 하셨습니다. 중동지역에서 동풍은 사막으로부터 불어오기 때문에 뜨겁고 건조합니다. 그런데
그 동풍을 주셨으니 햇볕과 동풍 바람으로 인해서 요나의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이 망하는
것을 보려다가 자기가 먼저 죽게 생겼습니다. 그 때에도 요나는 하나님께 성을 냅니다.
“하나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에 대답해 주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도 지지 않고 이에 대꾸를 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합니다. 요나의 모습은 자신의 유익이 되는 박넝쿨 하나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다가
그것이 없어졌을 때에 크게 성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내는 것이 옳다고 우기기까지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별볼일 없는 박넝쿨이 없어진 것은 아까워 그렇게 성질을 내면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깝지 않게 여기지 않는 모습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박넝쿨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 니느웨 백성들까지도 아끼고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때로 상대방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사람인지를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시하고 싫어하는 별볼일 없어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시면서까지 아끼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토록 아끼시는 사람을,
당신의 백성들도 아끼며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박넝쿨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아끼시는 니느웨사람들은 아끼지 않는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은 “네가 성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아끼고 사랑함을 깨닫고 하나님과 같이 아끼고 사랑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것이 너가 그렇게 성낼 일이냐?” 그리고, “앞뒤를 분간 못하는 12만명의 사람이 죽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너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던 박넝쿨 하나 죽었다고 성내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로 경험케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떠한 분인지가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요나와 같이 하나님께 성내며 속상하게 하는 사람까지라도 보내서 죄인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디모데전서
2:3-4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것을 우리가 증거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시듯, 우리도
한 영혼을 아끼며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요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을 품고 시역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선교사님과 그 가정을 더욱 아끼고 관심하시기를 바라고, 우리도 이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도요, 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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