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역사를 보면, 잔잔하게
흘러가던 것 같다가도, 어느 한 순간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들로 인해서 급속히 진행할 때가 있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산업혁명은 경제분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경제활동이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로는
공장에서 대량의 물건들이 만들어져 나오니까 그로 인해서 경제활동이 더욱 활성화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1928년, 세균학자인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이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은 항상제로, 몸안에 있는 병균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인해서 전에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도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계대전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이 죽고, 땅이 황폐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잔인함에 대한 반성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있는데, 바로 1517년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신부 마틴 루터가 그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권위에 도전하는 95개의 반박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당 문앞에 게시하였고, 이게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간의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개혁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그 당시에 종교개혁을 기념하며, 그 신앙적인
유산을 확인하기 위해서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교황청과 교회가 주장하는 것을 반박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에는 교황의 말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교황 무류성 (Papal infallibility) 이라고 해서
교황이 결정을 내릴 때에 그 결정은 성령의 은혜로 보증되기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는 교황이 지시해서 행해지고 있는 면죄부 판매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성 베드로성당 건축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사람이
면죄부를 사면 죽은 사람의 죄도 사함을 받아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고, 살아있는 사람의 죄도 용서함을
받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는 반박문에서 교황에게는 사람의 죄를 사할 힘이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면죄부를 가난한 신자들에게 팔아서 베드로 성당을 짓는 것보다, 어떤 부자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자기의 돈으로 성당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교황의 탐욕에 대해서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틴루터의 행동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자살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그 일을 단행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가 교회의 정권을 잡고자 하는 생각이나, 개인적인 명성을
높이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행한 것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그렇게 위험한 개혁을 단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지키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서학 교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가 깨닫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과 정책들이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성경의 말씀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교황의 지시와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 놓고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신앙의 기준으로두는 개신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500년 전 교회의
잘못을 개혁하시기 원하셨고, 이를 위해 마틴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개혁을 원하셔서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혁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어떠한 삶을 변화를 우리에게 원하시는지를 말씀드리고, 우리가 그 변화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라고 합니다. 곧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임을 믿게하는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에 이른다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지만,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자신의 의로운 행실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됨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최고의
열심을 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만한 완벽한 의를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으로 이스라엘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음에도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렀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죄악 가운데 구원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서 징계를 받게 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그 죄인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때에, 그들에게 또한
사사를 보내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죄인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를 통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메시야가 예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경들속에 나타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던져야 할 커다란 질문은, 죄인된 사람이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가지 않고, 구원을 받아 영생에
어떻게 이를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지한 질문이 마틴 루터에게 있었습니다. 사실 루터는 수도사나 신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더 (Hans Luder)는 탄광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아들 루터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습니다. (그의 열성은 한국 부모보다 더 했던 것 같습니다. 뭐가 되길 원했겠습니까?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한스 루더는 루터를 변호사게 되게 하려고 전적으로 투자했습니다. 한스
루다는 어려서부터 루터를 라틴어학교에 보내서, 당시 학문의 기초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18세때에 당시 독일의 최고 명문대학인 에르푸르트대학에 루터가
입학합니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 공부를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에 엄청나게 비쌌던 법전까지 사주면서 아들을 후원합니다. 그런데 루터는 법률 공부를 시작한지 2달만에
법학을 공부하던 곳을 뛰쳐나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루터의
아버지는 커다란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사이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그런데 루터가 수도사가 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심각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지 같은 해인 1505년에, 부모님을 뵙고 친구와 함께 대학으로 돌아가던 중에 폭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
폭우는 벼락을 동반하였는데, 그 벼락이 자신의 친구 ‘알렉시우스(Alexius)’에게 떨어져서 그가 죽게 됩니다. 이때 루터는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안나여 도와주소서. 그러면
제가 수사가 되겠나이다.” 성 안나는 마리아의 어머니이고, 광부들을
지켜주는 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일 이후에 마틴루터는 그 서약을 지키겠다고 하고, 에르푸르트학교가 운영하는 여러 수도원중에서 가장 엄격한, 아우구스티누스회
소속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마틴 루터는 평소에도 자신의 죽음과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벼락으로 죽는 친구를 보면서, 자신이 죽은 후에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고, 이것이 그를 더욱 두렵게 했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루터는 수사가 된 후에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고행을 통해서 죄의 댓가를 치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절망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도저히 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루터가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신앙의 전환점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전에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셔서 구원에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루터는, 그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의 목숨까지도 위험가운데 내놓을 수
있는 담대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아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능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며,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을 때에 삶의 대변혁이 일어납니다. 전에는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2. 그리고 성경은 구원의 지혜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온전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만, 아직도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이 있기
십상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미숙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2,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을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서 구원에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젖을 먹는 아이와 같은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숙한 사람이 계속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육신이 양식을 먹어야 하듯이, 영적으로 온전하게 성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변하는 것이 먹는 음식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에는 모유나 우유와 같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습니다. 갓낫
아이에게 주는 우유는 씹을 것도 없이 그냥 입에 넣으면 넘어갑니다. 어린아이가 먹는 우유에 밥알이라도
씹으라고 넣어주면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평생 우유만 먹고서는 충분히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자라면 이유식을 하게 됩니다. 밥이나
채소 등을 삶고 갈아서 부드럽게 만듭니다. 어릴 때에 부모님께서 밥을 씹어 주시기도 합니다. 과일을 먹어도 그것을 갈아서 먹도록 했습니다. 이제 아이는 조금씩
씹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유식을 또한 평생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더 크게 되면, 딱딱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음식을 생것으로도 씹어 먹습니다. 그렇게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게 되어서 더 성장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고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에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내 육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이럴 때에는 우유나 이유식과 같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말씀으로 양육을 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러한 우유나 이유식 같은 말씀을 먹으려고
기대한다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때로 믿음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뜻과는 상충되지만 믿음으로 받아 먹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깨닫고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전해 지는 것은 육신적인 성장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영적으로도 성장해서, 영육간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운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실 때에 그것 먹고 배부르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셨을 때에는 그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었으면 몸을 움직여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육신의 질병의 문제를 보면 못 먹어서 걸리는 병은 거의 없습니다. 도리어 너무 잘 먹어서 문제이고, 먹기는 잘먹는데 몸을 움직이 않아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는 것은 입에 즐거움이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운동하기를 게을리하다가 병에 걸리게 됩니다. 성도와 교회가 변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씀은 많이 아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그 어느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허약한 상태의 성도들과 교회들이 많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 바로 받아
먹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운동이 꼭 필요합니다.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7b-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운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육신을 훈련시킵니다. 훈련이라고 하면 한번하고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몇시간씩 육체의 연습을 해서, 근육도 단단하게 만들고, 몸에 기술을 익힙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늘 훈련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듭니다. 때로 마틴루터와 같이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다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삶의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으면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삶의 변화, 개혁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는 여러가지 동기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해 삶을 바꾸기도 하고, 편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
생활의 스타일을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의 변화와 개혁의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들의 삶의 개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되심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에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고난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이 예수님 임을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은 말씀을 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삶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육신의 양식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날마다 건강해지고, 온전해 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개혁, 삶의 개혁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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