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으신 마태복음 7:12절은 아주 짧은 단 한 구절이지만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율법들과 선지자들의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구절로 요약한 것이 바로 7:12절의 말씀인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입니다.
그래서 7:12절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있는 말들을 결론지어서 말할 때에 쓰이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5:17절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치심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완성하시는 가르침의 말씀이고, 이것이 7:12절의 말씀을 통해서 요약된 것입니다. 7:12절의 말씀이 예수님의 산상수훈만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말 전체를 요약한 것이니, 그 가치를 매기자면 황금보다 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7:12절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황금’과 같이 귀하게 여기며 꼭 명심하고 따라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7:12절은 어떤 내용이기에 그렇게 귀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7:12절의 말씀도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요약하면서,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대접해 주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먼저 다른 이들을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본 의미를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해야 하는 이유가,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 대접받기 위한 목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Give and Take” 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서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는 잘 대해 주었는데 상대방이 자신에게 그 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서운해 하고 관계가 틀어지게 됩니다. 또한 상대방이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대접하지 않기도 합니다. 별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12절의 말씀은 ‘Give and Take’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이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대할 때에, 아내가 나에게 이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아내를 대하고, 아내 또한 남편을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동료가 나에게 이렇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로 그 동료를 그렇게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 사람을 대하다 보면,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남이 아니라, 곧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나라고 여기며 대하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나의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잘 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잘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잘 대하고 있는지, 황금률을 어느 정도 잘 지키고 있는지를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1. 먼저, 다른 이들을 제대로 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상대방을 잘 대해주고 싶지만, 상대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형편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잘 대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에게 많은 관심과 신경을 쓰듯이, 상대방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을 잘 알고, 잘 대할 수가 있습니다.
고영성, 신영준 작가가 쓴 ‘완벽한 공부법’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제목과 같이, 어떻게 하면 공부를 완벽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룬 책입니다. 그런데 이책에서 말하는 공부는 단순히 학교에서 보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법이라기 보다는, 인생전체를 배움의 과정이라고 보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통해서 잘 배울 수 있을지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무엇보다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은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얼마나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할까에 대해서 관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공부법을 쓴 저자들은,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는데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IQ가 높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공부를 잘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14가지의 요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타인지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객관화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에 대한 것들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력도 효율적인 공부를 위해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8번째 요소로 사회성을 들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잘 해야 다른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 져서 공부도 잘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대인관계를 위해서 공감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UC 버클리 대학의 대처 켈트너 교수팀은 연구를 통해 지위가 낮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관점을 잘 읽는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아담 갈린스키는 ‘나는 힘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수록 타인의 대한 공감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교만하여 자신이 대단한 존재하고 생각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지만, 겸손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능력을 올려준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때에 다른 이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공감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CEO Sleepout’ 이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2006년 Bernie Fehon 이라는 사람이 홈리스들을 위한 자선사업으로 시작한 것으로, CEO 들이 홈리스들과 같이 길거리에서 잠으로 홈리스들을 이해하고, 그리고 자선금도 모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행사가 홈리스 그룹에 의해서 도리어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CEO Sleepout 을 하는 어느 행사에서 CEO 들이 모여서 자는데 실제 홈리스들이 그 모임에 동참하며 함께 자자고 했더니 이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펜스를 치고 외부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이 모습도 비판거리가 되었습니다. CEO 들이 홈리스를 이해하며 도우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홈리스들과 같이 되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
그런데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법을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CEO 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을 때에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사람들과 공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최고의 존재로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과 공감할 수 있어야 잘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겸손하게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대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외형적으로는 잘 대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 하나님의 가르침은 외적 행위가 사랑에 근거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40절에도,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하시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시는데, 그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외형적으로 볼 때는 경건하고 선한 것 같은데,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사람들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례로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제할 때에 회당과 거리와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나팔을 불어 구제할 사람들을 모이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구제받는 사람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자신을 대하듯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하거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이 많을텐데,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것을 신경쓰기 보다는, 자신들이 남을 돕는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행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해주기를 원하는데로 다른 사람을 대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 위에 더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으로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면, 어떤 일을 행할 때에 의무와 형식에만 얽매여서 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원래 율법이나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은 사랑을 그 기본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과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댓가없이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무엇보다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에 상대방을 제대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기대하며 사람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대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잘 대접받거나 댓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섬길 때에, 내가 베푼 것을 돌려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우리의 선한 행동의 댓가를 돌려받을 수 없지만,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13-14절,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접할 때에, 그 대접받은 것을 갚을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상대방을 아무리 잘 대해주더라도 그 사람에게 돌려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손해보는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도리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에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대접하고 잘 대해주지만 도리어 복이 되지 못하는 것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배은망덕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악한 것으로 받을 때에 얼마나 허망하고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복되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보시고 그것에 대해서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면 복된 것입니다.
잠언 19: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우리가 이 땅에서 베푼 것에 대해서 그 댓가를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주었는데, 그 준 것 만큼 돌려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러한 것들이 복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 갚음을 받지 못하지만, 도리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의 선한 대우에 대해서 갚아줄 능력이 있던지 없던지, 선을 악으로 갚던지 아니던지 간에 상관없이, 상대방을 나라고 여기고, 선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받는 복된 일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요약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면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듣기에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주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사회, 국가 등 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때에 다른 이들을 잘 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높아지고, 스스로 교만해지게 되면 공감능력이 떨어집니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 잡혀 있다면, 다른 이들을 대접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공감하셨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잘 대하기 위해,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좋은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고, 예수님과 사람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말하며,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하고 공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잘 대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행함의 동기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잘 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위선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할 때에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잘 대접지만, 그 대접한 것에 대해서 돌려 받지 못한 것을, 도리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귀한 황금과 같은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을 빛나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행함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황금률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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