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노아의 홍수 후에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후 시간이 지나면서 노아의 후손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의 특징은 온 땅의 언어와 말이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았어도 언어가 같으니까 서로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세계의 언어는 5000-7000개 정도로 추정합니다. 세계 공통어가 영어긴 하지만 수천개의 언어가 존재하니, 서로 언어가 달라서 불편하고, 때로는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단기선교를 가게 되면 가장 애를 먹는 것이 언어문제입니다. 선교를 가기전에 기초적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지만,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현지에 있는 한국선교사님이나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언어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같이 사역하는 현지 교인 중에 루이스와 그 가족들이 있는데, 루이스의 아들은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선교팀 한 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뽀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분의 볼에 뽀뽀할 생각은 않고 막 웃는 것입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부모나 현지 교인들도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스패니쉬로 ‘뽀뽀’는 아이들 말로 ‘엉덩이’나 ‘똥을 넣다, poo poo.”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여기에 응아할래?”라는 말이 되었으니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사람들간에 동질성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유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하나이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사람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일 때 행한 일이 하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까하여 서로 말합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그곳에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고, 그리고 대, 곧 탑을 높이 세우자는 것입니다. 땅이 평평하니 성을 쌓기도 좋고, 탑을 쌓으면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벽돌에 역청을 바르면서 성도 쌓고, 탑도 쌓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서로 소통이 잘 되니까 거침없이 탑을 쌓아 올립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는데, 그들이 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더 이상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 동안 한 언어만 사용했는데,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니까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달라지니까 탑을 쌓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일상생활로 대화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뽀뽀”를 말하는 건지 “똥”을 말하는 건지도 분간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서로 말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언어가 하나인 것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흩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말을 혼잡케 하셔서 흩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으십니다.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잘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한 유익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죄된 일에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면서까지 그들이 하는 일을 중단케 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리고 우리의 모습속에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헛된 수고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날평지로 옮겨간 사람들은 서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을 합니다. 그리고 성과 대를 쌓자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의 의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과 힘을 합해서 열심히 탑을 쌓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죄된 일에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높은 탑을 쌓자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 하늘은 신의 영역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닿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자신들도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벽돌과 역청을 쓸 정도로 뭔가 문명화 되고, 과학적으로 발전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영역까지도 도전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교만임과 동시에 무지함입니다.
사람들의 죄성이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거짓에 유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신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인 주권과 권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죄악된 일들을 빈번하게 했는데, 그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소통을 원치 않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하다가 결국 그것이 죄가 되었고, 그 하는 일들이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뜻을 구하며 소통하기를 원하시고 그 때에 그 뜻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바벨탑을 쌓는 헛수고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크고 은밀한 일들’을 알려 주시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자녀들이 때로 부모와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보면, 부모와의 소통이 뜸해지다가 단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옳은대로 판단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벨탑을 쌓는 헛수고의 인생을 살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는 죄된 일들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어떤 사람들과의 소통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열심을 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그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합니다. 벽돌로 쌓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다는 것은 그들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대단한 공적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그 이름을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이름과 그 권능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7:5절에도,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실때에도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에스겔 38:2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권능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자기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비롯한 신앙의 인물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갔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수 있고, 역청으로 높은 건물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않고 자신들의 이름과 능력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 결국 그들의 수고가 헛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일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허무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과 행하신 일들을 이 땅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이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경험케 해 주십니다.
늘 하나님과 소통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드러내는 영광된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3.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그 탑을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탑을 중심으로 해서 흩어짐을 면하자는 그들의 계획에 반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탑을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탑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 당시의 모습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을 이스라엘 진영의 가장 중심에 두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진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중심에 모시고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중심에 두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바벨탑을 쌓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모입니다. 물질을 중심에 두고서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특정한 사상과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모여 삽니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소통 이전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있어야 우선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있은 후에, 그 소통의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함이 없이, 사람들과만 소통하며 살아간다면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려고 하는 많은 과학적인 방법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보면, 통역과 번역을 해 주는 좋은 어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모르더라도 그 어플리케이션을 쓰면 외국인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그 어떤 소통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 힘써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배우고 그 뜻을 이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불통을 가져오는 잘못된 신앙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든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서,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과의 소통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또한 사람과의 소통도 가능하게 됩니다. 가족안에서도 부모나 자식, 부부간에 소통이 안 될때도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조차 서로 소통이 안될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먼저 하나님과의 소통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모든 가족들이,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소통을 이루어, 그분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우리 모두는 믿음안에서 서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바벨탑을 쌓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 모습을 보시면서 답답해 하시겠습니까?
간절히 원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소통에 더욱 관심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그 권능을 세상에 알려드리는, 하나님을 시원케 해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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