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에 저는 우리 교회 몇분의 남자분들과 함께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 관리를 스스로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하였고, 몇 분은 본인들이 직접 오일체인지를 하고, 브레이크 패드를 간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았을까 궁금해서 여쭈어 보니, 공통된 점이 ‘유투브’를 찾아 보아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유투부가 인기있는 것은 그곳에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 검색어를 넣기만 하면, 관련된 영상이 뜨고 자신이 알고자 원하는 것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투브를 '유튜브 선생님'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삶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알고자 열심을 냅니다. 어릴 때에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부모님께 귀찮을 정도로 물으면서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배워 갑니다. 그리고 좀 크면 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적인 지식을 배웁니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배움의 길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에 들어가 직장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배웁니다. 그리고 각종 매체를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배우기에 힘써야 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에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입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을 육신의 눈과 감각으로 바라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영적인 세계가 있음 알고, 영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세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영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관심도 그것이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때에 3년을 머물면서 사역했던 곳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쓴 편지인데, 이 편지를 쓸때에 에베소교인들로 인해서 감사할 내용이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좋은 소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멀리서 에베소교회에 대한 소문이 참 좋았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수고했던 교회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성도들도 사랑안에 잘 있다고 하니 그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하늘을 향해서는 주를 믿은 믿음이 있었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생활을 할 때에 더욱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더 알기에 힘써야 할 지를 깨닫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며 믿음생활하는 지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먼저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더 알기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교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앎,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 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는 ‘앎, 지식’이라는 뜻의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위에’라는 뜻의 ‘에피’와 ‘알다’라는 뜻의 명사인 ‘그노시스’의 복합어 입니다. 곧 하늘로부터 오는 앎을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주 듣게 되니까 그 이름이 친숙해져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을 잘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해 4월달에, 블랙홀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블랙홀을 관측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우주에 대해서 대단한 뭔가를 알게 된 것처럼 경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블랙 홀을 비롯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기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조금 더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계시해 주셨을 때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제한시키고 부분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어떤 것을 아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너무 멀리있는 것도 잘 알지 못하고, 작은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을 통해서 봐야 하고, 멀리있는 것은 커다란 망원경을 도구로 해서 보아야 합니다. 현미경이 있기 전에는 너무 작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망원경이 있기 전에는 너무 멀어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그 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어서, 우리로 영적인 감각을 깨워주셔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잘 알수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듣고 알아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너무 사모하는 바람에,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가 받게 될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야곱은 복된 일이 아니라, 아주 저주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형 에서가 분하게 여겨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는 이렇게 두었다가는 야곱이 죽게 생겼으니, 외삼촌에게로 야곱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리고 밤에 들판에서 자게 됩니다. 천막도 없었고 들판에서 자는 것이 불편합니다. 더우기 들짐승들의 공격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밖에서 야영을 하는 야곱은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밤에 잠이 들었고, 이내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해주셔서, 다시 평안가운데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자신을 보호해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욥같은 경우도 그랬습니다. 욥기 42:5-6절에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적으로 아는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하늘부터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더욱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성경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들음으로 아는 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서,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더욱 드러내시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서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을 구하며, 그분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간구해야 합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친구가 부릅니다. 그런데 왜 부르냐고 했더니, “그냥 불러봤어…” 라고 아무 이유없이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부른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심심해서라든지, 아니면 장난 삼아서 부르던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언제 알 수가 있습니까? 18절에는 “마음의 눈을 밝혀 앞으로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왜 사는지 그 존재의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삽니다. 어떤 이들은 잘못 알고 엉뚱하게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적인 출세와 성공에는 눈이 아주 잘 떠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우리의 소망을 이루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도 육신의 눈에 소욕에 따라 살아가는데 익숙했습니다. 에베소 지역이 그랬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중요한 도시였고, 무역 도싱였습니다. 아데미신전도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매일 보는 것이 세상적인 풍요함이었습니다. 육신적인 눈, 욕심의 눈이 밝아져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편함과 쾌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경험한 바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려고 갈 때에 길에서 하늘에서 강한 빛을 보았을 때에 그의 눈은 멀었습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해서 마음의 눈을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으로 하여금,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의 사도로 세워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에 소망가운데서 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20절에,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우리가 살아갈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 천직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일제치하 때 의사가 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께 이런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의대에 입학을 했고, 졸업 후에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 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84세되는, 성탄절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부르신 소망임을 알고 평생을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있는 이곳이 우연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지금 현재의 자리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가정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셔서 우리를 부르셔서 가정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교회로, 직장으로, 이 사회로 보내신 것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왜 불러주셨는지를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임을 깨닫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게 되고, 결국 우리가 하는 일들이 사람의 욕망을 이루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일, 천직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고, 믿음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에는 우리의 생각과 지혜가 너무나 협소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 때에 내 생각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내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성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삶속에서도 역사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살아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라고 믿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되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세상의 어떠한 지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풍성하시기를 원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소망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받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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