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사건이 지난 5월 29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있었습니다. 한국인 33명을 태운 유람성선이 다뉴브 강을 항해하다가 대형 선박과 충돌해서 침몰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한국 탑승객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지켜 보았습니다. 이러한 탄식은 한국 사람들만이 아니라, 헝가리 현지인들도 함께 탄식했습니다. 헝가리 사람들이 강변가에 나와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탄식하며 아픔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안타까운 상황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탄식을 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늘 기쁘기를 원하지만, 시시 때때로 탄식할 일이 생깁니다. 가정안에 탄식할 일이 많고, 교회와 사회에서도 탄식할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그런데 탄식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성령께서도 탄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탄식은 바로 성도들을 향한 탄식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은 어떠한 이유로 탄식하시는지를 나누면서, 성령님이 탄식하실 때에 우리는 어떠한 믿음의 자세를 구해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스스로를 보면서 탄식해야 하는 존재이고, 또한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는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고,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며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했을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기자는 성령님의 탄식을 말하기 전에, 성도들의 탄식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당장 하늘나라의 유업을 물려 받는 완전한 구원의 상태, 양자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속에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보다는 세상을 닮은 세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기에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진정한 구원의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연약함을 탄식하면서, 그 때를 소망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연약함을 두고 탄식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갔던 믿음의 거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탄식하는 것은, 자신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자신의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탄식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믿음으로 온전히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사도바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육신적인 욕망이나 무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기가 일 수 입니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육신적인 부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탄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의 사람들보다 탄식거리가 하나 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할 때에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는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결심과는 다르게 덕되지 못한 말을 하기도 하고, 원망과 부정적인 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생활을 잘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지한가를 깨닫고 탄식함이 있어야 합니다.
2.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님께서 아시고,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은 성령님만이 아닙니다. 사탄도 이를 압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행하는 잘못들을 보면서 정죄하며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면서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라고 한다면, ‘중재자’, ‘돕는자’. ‘옆에 있어 주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 이후에 성령님이 사람들의 연약함을 도우실 분으로 사람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늘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 있음을 시인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성도는, 성령님께 무엇을 도와 주기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26절에 보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연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도 모르는 연약함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알콜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가진 재산도 다 탕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은,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술을 더 사먹을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구할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낮아지고, 자신을 죽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높여주시고 강해질 것을 구하면서, 도리어 성령님을 더욱 답답하게 해 드릴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살아갈 때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어떠한 연약함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간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성도들을 위하여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부족함을 아시고, 중보기도 하심으로, 우리가 사탄의 계략에 빠져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어서 우리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생활할 수 있는 것도, 우리는 맨날 엉뚱한 것을 구하면서 살지 모르지만, 그래도 성령님의 중보하심으로 도우심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를 향해서 탄식하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성도로 살아갈 때에 교만이 연약함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입술이 연약함입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인 문제가 연약함이기도 하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연약함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나올 때에, 성령님께서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3. 그런데 성령님만 성도의 연약함을 보고 탄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성령님의 마음을 주시어서, 상대방을 보고 탄식하게 하시며 중보자로 세우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중보했던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사람들은 아론에게 와서 자신들을 위해서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금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지도 모르는 무지함,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할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하며 간구합니다.
출애굽기 32:31,32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죄악가운데 있는 그들을 보며 탄식하며, 하나님께 중보하면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거룩해져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지만, 때로 죄의 영향력 속에서 있는 연약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시며 중보기도하시면서, 또한 함께 탄식하며 중보할 사람을 원하십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교육전도사로 한 교회를 섬겼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의 교사들로 인해서 한숨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갔을 때에 초등학교를 담임하는 교사들 중에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를 간 대학교 1학년, 3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은 대학생은 되어 교사는 되었지만,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당황케 했던 것은 주일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교사가 아무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가해서 집으로 연락해 보니 아직 잠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교사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보다 자신들의 일을 하느라, 교사로서의 기본적인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 제 나이도 대학원을 다니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라, 그들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전도사의 지도를 제대로 받지 않는 그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시골에 있는 한 작은 학교를 빌려서 치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교육부장님, 그리고 저를 돕던 신학생, 이렇게 셋이서 함께 기도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일주일간 삼각산에 올라가서 산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밤 10시에 교회에서 모여서 한 차를 타고 산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산 정상부근까지 올라가서 밤새 기도하다가 새벽에 하산해서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특별히 대학교 1학년생 교사들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게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한 후에 첫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에 어떤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선생님들이 갑자기 바뀌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뀌었습니다. 중보기도를 하면서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고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제 연약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정죄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들의 믿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며 그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은혜가운데 마쳤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어떠한 분들의 연약함을 볼 때에 정죄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먼저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깨달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거나,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들의 연약함을 볼 때도 있으실 것입니다. 때로는 목회자인 저를 통해 보시기도 하실 것이고, 성도들 간에도 그러한 연약함을 보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보통은 상대방의 연약함을 볼 때에 질책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나의 모습을 보시면서 탄식하시고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상대방의 연약함을 보게 하셔서 내 연약함을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한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실 때에, 바로 나를 쓰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의 연약함을 볼 때에 그것을 가지고 정죄하며 비난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중보기도하시면서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연약함으로 탄식되거나, 또한 다른 사람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탄식이 될 때에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탄식이 나오는 일들을 만날 때에 탄식의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바꾸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럴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으로 인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서 탄식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에 무지한 우리들의 연약함이 있고, 또한 그 뜻을 알고서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구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우리가 상대방을 위해 중보하며, 도울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성령님의 탄식이 우리에게 느껴질 때에 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통해서 성령님이 상대방을 도우시고자 하시는 것도 또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탄식이 나올 때에 도리어 기도하시고, 도리어 상대방을 격려하며 일으키는, 성령님의 위로를 전하고, 일으키는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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