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는 크리스티나 전도사님께서 ‘가스펠, 복된 소식’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4일간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강사 전도사님께서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셨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다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구원받은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회개와 함께 삶의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데,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없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확실할 수 있겠냐며 도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와, 이에 따른 삶의 변화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 신앙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삭개오 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삭개오가 구원함을 받았음을 확언해 주셨습니다.
삭개오가 구원받는 장면과 그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는 지를 살펴 보면서, 또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구원은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죄인을 찾아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가실 때에, 그곳에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이 말로 우리는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불의하게 세금을 걷어서 바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삶의 주인은 세상의 돈, 물질이었고, 그 물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 삭개오였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록 더욱 부자가 되고자 했고, 그 물질들로 위로함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삭개오가 자신이 사는 곳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보게 되면,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모습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예수님을 보기 위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죄인취급하는 것이 싫었을 텐데,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군중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악조건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까치발을 해보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보려했지만 되질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막혀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보면 삭개오와 같은 상황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데 때로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도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역기능을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악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해서, 예수님께로 가려고는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며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때로는 사람들에게 신경쓰다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예배를 드릴 때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더욱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에게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 목표가 정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고, 같이 믿음생활하는 사람들의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예배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손해가 아니라, 내 손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삭개오는 그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그 열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키가 작다는 것으로 예수님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키가 작다는 단점으로 인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더욱 적극적으로 열심을 가지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겠다고 몰려다니면서, 정작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군중들을 벗어나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 앞에 돌무화과 나무를 보고 그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키가 작지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면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키가 작은 세리장이 평생 그 돌무화과나무를 올라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무화과열매를 따기 위해서 올라갔을 수도 있지만, 세리장이 돈주고 사먹으면 됐지 굳이 그곳에 올라갈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막 오고 계시는데, 빨리 나무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익숙하지는 않고, 고생좀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를 오르는 이유는 단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체면이 있는 세리장이든, 키가 작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보기 위한 그 일념을 가지고 무화과 나무를 올랐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기 위해 나무를 올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자신의 체면까지도 버리고서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그토록 갈망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삭개오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수고했는데 못 볼거면 보고 말지하고 뒤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가깡이 하기 위해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시기 전에 감사하게도 나무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가까와집니다. 군중속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온갖 좋은 소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죄인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선하게 대하시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을 삭개오에게,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밑을 그냥 지나가시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고개를 들어 나무위에 앉아있는 자신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계셨고,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그것처럼 감격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그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삭개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에 이러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하신 이유가, 삭개오가 다른 사람들보다 의로웠고 잘났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을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더니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삭개오의 집에 갔다가 아니라, 죄인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삭개오의 집에 유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오신 것이 죄인을 부르고, 병든자를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가 세리장이고 사람들로부터 악평을 듣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실이 어떠하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 자리에 온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불쌍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쌍히 여기셔서 더 가까이 와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셨을 때에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대하실 때에 단순히 얼굴보고 인사하고 지나치지 아니하십니다. 그의 집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삶속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자리에 이른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신에 삶에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께서 요청하지도 않으신 일을 합니다. “예수님, 제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봉사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자신의 소유, 물질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인다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동안 삭개오의 삶의 중심, 주인은 돈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세리장의 일을 관두지 못했던 것도 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 그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그 돈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 돈 때문에 죄를 지었고, 그 돈으로 인해서 삶의 만족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오시니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자임을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했던 삶이 죄인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중심에 있던 주인, 내 자신이나 물질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주인으로 삶고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구원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말을 들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죄인 삭개오가 구원받았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전에 있는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또 다른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인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어떻게 해야 얻을지를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관리는 쾌재를 부릅니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 관리는 자신은 문제없이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가지를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주라 그리하며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은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부자인 관리의 삶의 주인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 물질을 주인으로 해서 그 물질을 따라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어려서부터 했지만, 정작 그 삶의 주인은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너의 삶의 주인이었던 그 물질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영생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주인이되어서 물질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자 관리는 그 말씀을 듣고도 주저합니다. 심히 근심하면서 있었습니다.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관리는 그 물질을 포기하지 못해서 근심하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즉각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망설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셔들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Look, Lord! Here and now”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니, 바로 지금, 여기서 과거의 주인을 포기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반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가 속여 빼앗은 일이 없어서 자신있게 그렇게 말한 것인지를 알수 없지만, 그는 더 이상 물질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네배로 갚아준다고 하면 그는 이제 파산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렇게 즉각 결단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과거 물질로 인해 위로받고, 힘을 얻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그러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제 예수님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고,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변화는 내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여기에서 결단할 때에 그 구원의 기쁨이 날마다 누려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가장 복된 소식,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의 소식을 삭개오와 같이 누리지는 못합니다.
의롭게 보였던 부자 관리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근심하였는데, 도리어 죄인된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감격은 내가 의로워서 누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록 더욱 경험되게 됩니다. 내가 꽤 그럴듯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구원과 그 감격은, 과거 자신이 주인으로 삼았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모시고,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죄인된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나의 추한 모습을 너무 잘 아시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외면하거나 조롱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나의 더러운 집안에 유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내가 지금 이곳에서 회개하며 주님앞에 나아갈 때에 이를 반겨하며, 구원이 이곳에 이르렀다고 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삭개오와 같이 주님을 만남을 사모하고 기뻐하며,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복음의 능력이 삶의 변화로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좋은 길잡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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