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감사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감사로 살아갈 때도 있지만, 어떤 일에는 불만족과 불평으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께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지 않아서, 그들을 찾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한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열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나병환자은 그 당시에 그 누구보다 끔찍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나병은 외형적으로 볼 때에도 숨길 수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은 나균에 의해서 생기는데, 나균이 몸에 들어와 발병을 시키며 몸에 염증이 생기게 합니다. 급기야 그 염증이 심해져서 살이 썩어서 얼굴이 흉측하게 변합니다. 심지어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이 썩어져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나균이 아픈 것을 느끼는 신경을 마비시켜서, 통증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이렇게 끔찍한 병을 앓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병에 걸렸다고 동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병이 죄로 인해서 걸렸다고 그 사람들을 죄인취급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성경에 보면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나병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얻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문둥병에 걸린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비방하여,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는 죄로 인해서 나병이 생겼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가 나오는데, 게하시가 나병에 걸린 이유도, 주인에게 거짓말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을 때에, 문둥병이 생겼고, 그것이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이를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니 나병에 걸렸다면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 취급을 하니 참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나병은 전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나병에 걸렸는지는 제사장이 보고 진단합니다. 만약 나병에 걸렸다고 판명이 되면,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스스로 나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병있는 날 동안 늘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열명은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지극히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중에 있는 열명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병이 나았다는 것을 진단받으라는 것입니다. 나병에 걸린 것을 진단하는 사람이 제사장인 것처럼, 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진단하는 것도 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몸이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한명이 아니라, 10명 모두가 나았습니다. 그 동안 나병으로 인해서 그토록 고통을 받았는데, 그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열명 중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사람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한명을 보면서 질문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이 있어야 할 자리는 감사의 자리였습니다. 10명이 모두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한명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감사치 아니한 아홉명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범사에 감사하는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를 살피며, 더욱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우리가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희랍어로 은혜는 ‘카리스’입니다.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상대방에게 베푸는 호의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카리스에서 파생된 단어 중에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카리스’ 곧 ‘은혜’가 풍성한 상태를 ‘유카리스테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은혜가 풍성함을 깨달을 때에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이 깨달아질 때입니다.
우리는 10명의 문둥병자중 9명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 끔직한 고통에서 건져내주었으면 당연히 그 은혜로 인해서 감사함으로 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서 감사할 만큼의 일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가정과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나기 쉽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가 잘하던 못하던 상관없이 당신들의 자녀를 사랑과 헌신으로 양육합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자녀는 부모님께 날마다 감사합니다고 하지만,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에 불평을 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은 감사할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깨닫지 못하거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들을 발견해 나갈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모든 일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최고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마리아 나병환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 믿음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실 메시야임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가 처음 예수님을 부를 때에 말하기를 “예수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돌아 온것은, 예수가 죄로 인한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단순히 선생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됨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하게 했고, 또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육신적으로 병이 낫고 건강하게 사는 것들이 아닙니다. 아홉명의 나병환자들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얼마동안 살면서 이런 저런 병에도 걸릴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육신이 죽어 장사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명의 나병환자가 복되었던 것은, 그는 그 병고침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고, 구원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내용임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로 여겨지게 됩니다. 나병에 걸렸으니 병고침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인 줄 믿습니다.
‘Fanny Crosby패니 크로스비’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00년대에 사셨고, 찬송가 1만2000곡을 작사하셨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잘아는 ‘예수 사랑하심을’,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를 비롯해서 수 많은 찬송가 가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앞을 못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1820년 3월에 뉴욕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출생했는데, 태어난지 6주만에 의사가 잘못된 약물치료를 하여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한살을 갓 넘겼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패니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큰 도시로 가 부잣집 하녀로 일했습니다. 할머니는 앞을 못보는 패니곁에서 성경말씀을 읽어주셨고, 그녀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패니가 11살 때에 그 할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패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12000곡의 찬송가 가사를 썼던 것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어떻게 당신이 장애인임에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나요. 당신의 눈을 상하게 한 의사를 용서하기가 어려웠을 텐데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패니는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마세요. 그를 다시 만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귀한 선물을 제게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할 거예요. 할머니는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르쳐주셨지요. 결국 그 분은 그렇게 하셨어요. 주님은 보이지 않는 나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대로 하신 거랍니다. 만일 당신이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보여주세요. 내 행복의 잔은 사랑하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넘치고 있어요.”
그녀는 눈을 잃었지만, 그것도 주님의 은혜, 선물로 깨달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육신의 상태나 환경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최고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임을 깨달을 때 감사가 시작되고, 그 감사가 모든 삶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모든 일에 감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 주어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가 아니라, 불평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운데 하나는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기꺼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그들은 죄의 병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들이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비록 한 사람만이 그 은혜에 반응했지만,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그 몸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그 몸을 가지고서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것도, 죄인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해 주신 몸을 가지고 직접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로 예배드리는 것은, 주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3:2절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때에 일어나는 현상중에서 하나가 ‘감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주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하는 이들보다, 그 은혜를 모르고, 당연하다고 살아가며, 때로는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이러한 사회를 보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럴 때 일수록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예수님의 발앞에 나와 감사하는 그 한명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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