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천재적인 과학자로 불려지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론 물리학자로서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300개 이상의 과학 논문을 포함해서 과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 아인슈타인이 어느 날, 다른 도시에 강연을 하기 위해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자 기차표를 검사하는 승무원이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기차표를 보여 주려고 표를 찾는데 어디에 기차표를 두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표를 찾는 사이에 승무원이 아인슈타인에게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검수원이 아인슈타인을 알아봤습니다. 기차표를 허둥지둥 찾는 아인슈타인을 보고 이 승무원은 아인슈타인에게 표를 찾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게 여행하라고 선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인슈타인은 그럴수 없다며 계속 표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 승무원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그 기차표를 봐야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하며 계속 찾더랍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은 20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는데 끝내 집 주소를 외우지 못했고, 종종 집으로 가는 길도 잊어버려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집을 찾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 해도 다른 쪽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사교적인 면에 약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정신적인 약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연약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이런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왔습니다. 육신적으로 연약하여 병든 이들,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 이들이 예수님께로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들의 육신적인 약함과 병듦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내용인데, 이사야 53:4절에는 이것이 죄와 연관되어져있습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병듦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연약함과 영적인 병의 문제였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건강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그 영의 상태는 연약하여서 병들어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의 상태에 있음을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연약함이 도리어 죄악으로 발전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연약함 중에 어떻게 강건한 믿음을 세워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영적으로 지극히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죄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 가운데 사람의 모습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한 가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고기를 얻기 위해 양을 쳤습니다. 그리고 양의 양털은 옷을 만들어 입거나 장막을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을 치는 사람들도 많았고, 양의 습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들은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사야는 그 양들에 대하기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라고 말합니다. 양들은 눈이 나빠서 눈앞에 있는 풀을 뜯으면서 정신없이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무척 많아서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다가 쉽게 무리에서 이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방향감각도 없고,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초지를 찾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과 싸울 힘이나 빨리 도망갈만한 스피드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양은 맹수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사람의 연약한 모습이 마치 무지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양과 같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문제와 고통들이 있음에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무지함이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세상 것을 쫓아서 살아가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죄가운데 빠지게 될 때도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병들어서 영적인 풍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물질에 연함을 가지고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나옵니다. 그 둘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약속하기를 자신들의 전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재산을 팔고 난 후에 막상 그 판돈을 받아 보니 전액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만을 가지고 사도 베드로에게 왔는데, 사도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것이 너희가 판 전부냐?” 그런데 그 때에 그들이 무지한 말을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욕심에 빠져, 지금 그 곳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심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부부가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물질에 약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때로는 그 어린 아이를 통해 사람들의 죄의 성향을 본다고 합니다. 한 엄마가 아이가 조용해서 뭐하나 보니까, 엄마의 립스틱을 꺼내서 입술에 바르는데 서투르니까 입술의 경계를 지나 얼굴 이곳저곳을 바르고 있더랍니다. 엄마가 이를 보고서 아이한테 가서, “너 엄마 화장품에 손 대지 말랬는데 손댔어 안 댔어?” 그러면 아이가 얼굴에 잔뜩 립스틱을 바르고 하는 말이 “화장품에 손 안댔다”고 하더랍니다. 엄마가 화낼 것을 무서워해서 가르쳐주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는 연약함이 아이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세상에 있는 악에 노출되어 있고, 언제든지 그 악의 영향력을 받아 살아갈 만한 영적인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죄에 대한 연약함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간의 불화의 문제들, 물질에 대한 욕심,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폭력적으로 대하고, 거짓으로 대하는 악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러한 영적인 연약함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듦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저 같으면 사람을 완벽하게 만드셔서 신경 쓸 것이 없게 하실 수도 있으신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력이 없으셔서 사람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의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늘 관계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병들고 귀신들린 예수님께 나와 고침받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광 돌렸던 것과 같이,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친밀한 관계속에 살아 가기를 원하셔서 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앞에 나올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시기 보다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죄악을 이기며, 영적인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가 부족한 것에 대해서 그것도 모르냐며 부끄럽게 만들거나 꾸짖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사람의 연약함을 보시고,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연약함 가운데서 저지르는 일들을 친히 담당하시고 사람들로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에 얼마나 연약함 가운데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머리를 가눌 수가 없는 연약함이 아이에게 있습니다. 아기들은 자기의 대소변도 가리지 못합니다. 그저 젖을 물리면 입으로 젖을 빨아들이고, 잠자고 울고하는 것뿐입니다. 그 아이처럼 연약한 아이가 어디있습니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제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부모가 그 아이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가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그 아이의 목이 꺽일세라 조심해서 아이를 안습니다. 아이가 울면 운다고 야단치기 보다는 뭐가 불편해서 우는지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는 아이를 보면서 걷지 못한다고 나무라지 못합니다. 기는 것만으로도 기특해서 기뻐하며 안아줍니다. 부모님들이 한없이 연약한 아이를 보면서 나무라지 않고, 도리어 더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불편함을 감수하고 돌보는 것은 사랑이 있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수록 더 귀히 보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삶속에서 연약함을 체험할 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하나님께로 나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탄입니다. 사탄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볼 때에 하나님과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약점으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 뱀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그녀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그녀의 불신앙적인 모습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극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허영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하와는 그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죄짓게 만들고, 연약함을 정죄하며 절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죄가운데도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들에게는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그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도와 주시고, 때로는 그 연약함을 손수 담당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우리를 연약함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연약한 우리들은 때로 서로에게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악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어떤 부분에서는 더 심각한 연약함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과 병듦을 담당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병듦에 있는 이들을 볼 때에 가련한 마음이 듭니다. 돕고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밥도 해 드리고, 격려의 말도 해드리고 빨리 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있는 이들을 향하여, 사탄과 같이 정죄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돌보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서로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고 온전해 집니다. 우리의 관계의 온전함은 서로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 부족하기에 서러 긴밀하게 돕고 보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았을 때에 행하신 일이고, 또한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서로의 연약함을 돌보며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으로 인해서 죄와 허물가운데 빠져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며 죄짓게 만들고, 일단 죄를 지으면 그것을 정죄하며 사람을 절망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지만 그것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으로 오는 죄와 허물까지도 담당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완벽하고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합니다. 나도 아담과 하와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영적인 무지함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죄의 병이 들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양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각기 옳은 줄 알고서, 제멋에 살아가는 존재가 양같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각기 제 갈길로 가다가 사탄의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보며,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보듬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하니 하나님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만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약하오니 힘을 달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연약함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한 이들을 볼 때에 주님과 같이 사랑으로 품어주며,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함들이 죄로 발전하는 일이 없고, 도리로 그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날마다 친밀해 지는 우리의 모습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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