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오셔서 고쳐달라고 소식을 전하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이 된 후에야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니이다.”(11:20) 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동일한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바러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그 둘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전에 오지 않으신 것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메시지를 전합니다.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나사로의 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감기 정도 걸린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숨이 위태한 중에 예수님의 고쳐주심을 바라며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님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 보기에, 나사로는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고, 예수님을 찾았을 때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병에서 고쳐주시기 위해서 바로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나사로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요단강 저편에 계셨는데,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을 때에, 슬픔에 쌓인 상가집에 예수님께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르다와 마르아가 예수님을 뵐 때에 서운하지 않았겠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의 소리는 두 자매만의 소리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병들어서 빨리 낳기를 소망하며 기도할 때에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삶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좀처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악화될 때도 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19로 인해서 패닉이 된 사람들과 사회를 보면서,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분의 개입을 원하실 때에 개입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가치있는 일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로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반대로 예수님은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 도리어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로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 사랑하는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 두시고, 사랑하는 남매를 슬픔에 빠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를 알려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신 예수님은 바로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집이 있는 유대, 베다니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으로 가자고 하실 때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모르셔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었고 장사지낸바 된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지 못했기에, 나사로가 병들은 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시러 가자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나사로가 죽었다.”고 제자들이 알아 듣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잠자는 것과 죽는 것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납니다. 죽음이라고 하면 모든 것의 끝이지만, 잠을 자는 것은 죽은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육신의 죽음이 모든 것에 끝이 아님을 알려 주시고자 하심을 알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깨어나야 할 잠자고 있는 상태임을 암시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 잠을 깨우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은 자를 깨우실 수 있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사로에 집에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집에서 나와 예수님을 맞이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소식을 듣고도 집에 그대로 있습니다. 만약 나사로가 죽기 전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앞에 뛰어 나와 예수님의 손을 끌며, 죽기 전에 빨리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달라고 재촉했을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실 때까지 예수님을 뵈러 오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예수님이 오셔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마리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나 예수님을 만날 때에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라는 말로 예수님을 맞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님때문이라는 짙은 원망이 담겨진 말입니다.
2. 그런데 마르다는 이에 덧붙여 느닷없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수님이 구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동을 보면, 그녀의 고백과는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자신이 말한대로 마르다가 믿는다면, 지금 마르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게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 제발 내 오라버니, 당신이 사랑하는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구해 주세요.”라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간청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말을 들으시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마르다가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면, 마르다는 이 말을 듣고서 기뻐 날 뛰어야 됩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담담하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살아나리라는 말을, 종말에 있을 미래의 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니엘서 12: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라고 했는데, 다니엘의 예언과 같이,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종말에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마르다의 말은 나사로가 종말 때에 부활할 것을 말하지만, 현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의 상태가 마리아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바램으로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씀으로는 배워서 알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믿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르다와 마르다의 상태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들의 제한적인 믿음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병까지는 고칠 수 있으시지만, 죽음까지는 감당할실 수 없을 것이라는 온전치 못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마르다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이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던 믿음이 이것이었습니다.
마르다의 말과 같이 마지막 날 때에 부활이 있겠지만, 그 마지막 날에 멸망의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사람으로 부활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때에, 마지막 부활때에도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다음에 나사로가 죽어 있는 무덤으로 가십니다. 돌로 막힌 무덤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이 때 마르다가 또 한마디 합니다.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죽어 썩어져가는 시체 앞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의심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는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부활과 생명이 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인데 온전히 믿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11:31).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리고, 나사로는 장사지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손과 발이 베로 묶여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있는 채로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을 통해서 마르다를 비롯한 제자들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예배하는 나 예수는, 너희를 구원한 구원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금 나를 믿는 자는 육신의 죽음과 삶에 관계없이 부활한 자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나사로는 또한 죽게 됩니다. 우리도 오래 살건 짧게 살던지간에 결국은 육신의 죽음을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생명과 부활의 능력되심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믿음은, 우리가 비록 육신적으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믿을 때에 참 영생의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르다의 가족에게 그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들앞에 나타나시는 것을 지체하셨고, 마르다가 고백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즘 코로나 19와 관련해서 율리안 우르반(Iulian Urban)이라는 의사가 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다.”는 제목의 글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낱 인간인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상황에 더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지쳤고 우리의 동료 2명은 사망했으며 다른 동료들은 바이러스에 확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끝나는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짧은 몇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눕니다. 치열한 무신론자였던 우리가, 지금 매일 우리의 평강을 구하고 우리가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를 주님께 구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이 땅에서 나의 무용함을 깨닫지만, 나의 마지막 호흡을 다른 이들을 돕는데 줄 수 있기 원합니다. 나는 나의 동료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에 둘러싸여 내가 하나님께 돌아온 것에 기쁨이 넘칩니다.”
때로 우리는 나사로의 죽음 이후에 오시는 예수님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까지 몰고 가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없으시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까지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영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참된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말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부활생명이 됨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통해서 믿음의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는 믿음이 정련되어서 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처하는 절망의 순간가운데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더욱 굳건해 지고, 부활의 신앙가운데서 담대함과 평강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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