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부활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고,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과 같이 영원한 몸을 입고 부활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 온 또 다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면 불행하고, 자신이 성취한 것들이 무의미해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한 사람은 그 삶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잠언 17:1절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습니까? 그 어떤 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면 좀 떨어져서 있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하게 되었으니, 이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화평을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수고를 하셨는지를 보며, 우리가 그 화평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하는 것은 그 전에 화평하지 못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신데, 피조물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을 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내 마음과 육신에 원하는대로 살면, 하나님께 죄를 짓고 불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한주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과 불편하거나 좋지 못한 관계속에 있는 분들이 있지 않았나요? 상대방이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 마음대로 살아갈 때에 마음이 불편하고 화평을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같이 사는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잘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우리 맘대로 하다가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조목조목 적어서 법으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늘 유지하면서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들의 뜻대로 방종하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그 말씀을 완벽히 이룰 만큼 온전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관심하지 않고, 세상에 관심하게 함으로 지속적으로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죄를 지으면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함으로 우리로 절망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나의 잘못을 감시하시고 정죄하시는 분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있을까봐 불안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2.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화평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이 보기에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부족함까지도 품고 받아줄 때에 화평이 시작되고, 서로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선하고 공의로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요한일서 1:8-9,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불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와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이 갑자기 착해지고, 의롭게 됩니까? 말소리와 행동이 천사처럼 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불의한 존재로, 사람과도 불화하고, 하나님과도 불화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4:25절에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하심이고, 이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는 것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의로운 존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라고 했을 대에 그리스어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의롭다고 여겨주다.” “칭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의롭지 않을지라도,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것입니다.
곧 사람들은 죄가 여전히 있는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다 지고서 그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죄가 없는 사람으로 의롭게 여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우리가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영적인 상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마틴 루터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죄를 즐기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매 순간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죄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마틴루터는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생각과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보실 때에, 진노하고 계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두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던 마틴 루터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것은 로마서 1:7절의 말씀을 깨닫고 나서였습니다.
로마서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틴 루터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틴루터가 이를 깨닫게 되니, 그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신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그전에 경험하지 못한,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3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 먼저 하나님에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죄인인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죄인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렸는데, 의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의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과 선함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도리어 죄가 많던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의로운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용납하시고 화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사도바울은 또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관심하는 영광은 자신이 영광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칭송받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세상에서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영광은 대단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영원하지도 않고, 허무하기까지 합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허무한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하고, 결국은 사람들이 허무한 존재가 되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가치있게 여기며 즐거워하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때에, 우리는 이 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영광을 받기 위한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그리고, 이제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자들이 가지는 또 다른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인 아닙니다. 도리어 불평하고 화를 내야 할 일입니다.
가정이나 사업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 “아 즐거워”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난리인데, 그것을 보면,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환난을 당할 때에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은 로마제국으로 부터 박해와 죽임당하는 심한 환란의 때였습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런데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환난을 통하여서 소망을 이루고자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이 주는 유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내를 이룹니다. 인내라는 ‘휘포모네’라는 단어를 쓰는데, “확고함”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확고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좇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집종이 당신도 그와함께 한 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에 그렇지 않다고 3번 부인하며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인내함으로 더욱 견고해 지기 때문에, 고난받을 떄에 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도키메’라는 단어를 쓰는데, “증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환란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입증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처음에는 환난을 당할 때 믿음이 흔들리지만, 환난을 통해 더욱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결국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망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나의 소망이심을 믿는 믿음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큰 즐거움 가운데 있게 됐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평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는 불의한 존재지만, 그것을 아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믿기만 해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화목을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즐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땅에서 영광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더라도 이제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낮아지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환난도 즐거워할 존재가 됩니다. 이 환난을 통해서 믿음이 연단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잠깐이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은 영원하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 우리와 화평하시고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더욱 이 화평을 누리며,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 생활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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