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조커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에는 ‘아서 플렉(Arthur Fleck)’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광대가 직업인 그는 어느날 광대 분장을 한채로 버스를 타게 됩니다. 대교를 달리는 버스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어린 아이가 돌아보자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주며 아이를 웃게 만듭니다. 이를 본 아이 엄마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서에게 말하는데, 그 때 아더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합니다. 아더의 정신병이 발작된 것입니다.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아이 엄마가 불쾌해하며 ”뭐가 그리 웃기냐”고 따지자, 아서는 늘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카드 한 장을 건내 줍니다. 그 카드에는 ‘죄송해요. 저는 기분과 상관없이 갑자기 웃는 병이 있어요’ 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서는 다른 사람이 웃지 않는 부분에서 웃음을 터트리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치를 받기도합니다. 아서는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웃게 되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도 ‘아서’와 같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기뻐해야 할 때와 슬퍼해야 할 때를 혼돈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세대를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시장에 모여서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잔치집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기도하고, 때로는 장례식집 놀이를 하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피리를 불때 친구들이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해 주고, 울때에 가슴을 치며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 슬픈 일을 보며 슬피 우셨고, 기쁜 일을 보면서 피리를 불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뻐해야 할 것에 춤추지 않고, 슬퍼하며 가슴을 쳐야 할 때에 가슴을 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때의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웃음코드가 달라고, 슬픔의 코드가 달랐습니다. 진정으로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뻐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던 사람이 있는데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기쁨을 알았던 사람이고, 그분의 슬픔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피리를 부시며 기뻐하셨고, 무엇을 보시며 슬피 울었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세례요한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우리가 슬피 울어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라고 하는 것이 장터에 앉아 노는 아이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뒤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우리인 것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과 ‘우리’ 라는 동질성을 느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슬퍼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고발하며, 죄를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많은 슬픈 일이있지만, 근본적으로 슬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지은 죄로 인해서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슬픔 가운데 있는 세례요한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를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을 먹으며, 금욕하는 절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슬퍼하는 요한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슬픔을 느끼는 코드는 세례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슬퍼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슬퍼해야 할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인해서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이러한 슬픔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로마서 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했습니다. “곤고하다” 는 것은 “비참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에 통곡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탄식합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에게 슬퍼할 만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죄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슬퍼하셨습니까?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시며 신세한탄하셨습니까?
우리가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의 육신의 삶을 보며, 슬퍼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죄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 다지 슬퍼해야 할 심각한 일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된 모습을 우리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여기시고, 슬퍼하시며 가슴을 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은 그 슬픔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지실 때에,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곧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서 멸망 당하게 될 텐데 그 때를 살아갈 자신들을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의 모습을 보시며 슬퍼하셨던 주님과 함께 울고, 그 해결함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울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님의 슬픔을 외면한 채 혼자 울지 않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슬퍼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뻐할 것은 기뻐하도록 피리를 부시며 함께 춤추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금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피리를 부시며 사람들로 춤을 추도록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능력의 주님, 구원의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야인지를 확인하러 왔을 때에, 세례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예수님이 맹인, 못걷는 이들, 나병환자 등을 고쳐주시고 자유케 하신 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이러한 병들은 죄로 인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병들을 고치신 것은 곧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구원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죄로 인해서 애통해 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와 같이 지낸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주님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죄를 사해 주셨고 친구과 되어주셨으니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슬퍼했던 이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의 피리를 부실 때에 이를 듣고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리며 춤춘 여인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폭리를 취하여 얻은 재산을 돌려주면서 함께 춤을 춘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 인한 슬픔에 머물러 있도록 두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고 구원의 피리를 부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애통하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시는 분이요, 슬퍼하는 이들에게 찬송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속의 피리를 불으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 춤추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늘 기억하며 기쁨으로 춤추며, 그 은혜를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슬퍼할 일과 춤을 추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 춤출때는 언제입니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성공적이고 풍요한 삶을 살아갈 때에 춤을 추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 때가 춤을 출 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영적으로 빈곤한 상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의 삶을 살아간다면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이 때는 기뻐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울며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우상을 섬긴 악명 놓은 왕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와서 그가 행한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임하고, 그에게 속한 남자가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때 아합이 어떻게 하신지 아십니까?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열왕기상 21:27)
아합왕이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며 하나님 앞에 베를 입고 통회하는 아합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아합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앞에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하셨습니다.
악명 높았던 아합이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인해 슬퍼하실 때에, 자신도 베옷을 입고 함께 슬퍼하며 가슴을 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기쁨의 피리를 불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시면서 어떤 부분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셨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피리를 불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며 춤추기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춤추며 하나님을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며 애통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에 동참하며, 하나님을 속상하게 해 드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밤낮으로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타락해서 하나님을 애통케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을 향해 애통해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지만, 오늘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 우리가 춤출 수 있도록 피리를 불어주신 주님의 은혜로 기뻐하며 춤을 추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피리를 불며 춤을 추고, 언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십니까?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웃고 우십니까? 혹시 예수님이 애통해 하는 일에 춤을 추며, 예수님이 피리 부시며 기뻐하시는 일에 시큰둥한 일은 없으십니까?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춤을 추고 계십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타락하며 악해져도, 세상의 풍요를 바라보며 그것으로 춤을 춥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기쁨을 깨닫지 못하고 슬퍼하며 절망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나와 내가정을 보시면서 슬퍼하기도 하시고, 기뻐하기도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보며 애통해 하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있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기쁨을 잊고 슬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변에서 외롭게 혼자 춤을 추시며, 혼자 외롭게 애통해 하지 않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세례요한의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오늘 이 세대를 보시고 슬피 우실 때에 주님과 함께 가슴을 치며 울 수 있고, 기뻐하시며 피리를 부실 때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과 기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로 깨닫게 하고, 세상을 구원의 기쁨으로 인도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이 보실 때에 ‘우리’라고 여기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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