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죄인된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 그 어떤 것보다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 째 아들이 아버지께 말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고 말합니다.
그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을 미리 떼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쯤에 아버지가 주시는 것인데, 건강한 아버지 앞에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분깃을 가지고 뭔가 대단한 일을 미리 계획한 것이냐하면 나중에 그의 쓰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꾸짖지도 않고, 그 아들의 요구대로 그의 살림을 내어 줍니다.
그리고 유산을 미리 받은 아들은 며칠이 안되어 재물을 다 모아서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게 되고, 이 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의 돼지를 키우면서 사는 미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고자 하지만 이를 주는 사람도 없어 굶주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못되게 하고 떠나 아들이, 아버지 아들로서의 존귀함과 권세를 잃어 버리고 세상에 내 버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둘째 아들을 보면서‘참 못되고 어리석은 아들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두 아들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비유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곧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 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보시기에 이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 보게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자녀의 존귀함과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존귀함을 주셨는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된 존귀함과 권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하고, 그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날 때에도 그를 제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 떠나는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그를 붙잡아 둔다고 머물러 있을 아들도 아니고, 그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냅니다. 아버지는 버려지는 자의 아픈 마음을 품고, 아들을 보냅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 왜 그가 아버지를 떠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살면서 그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했습니다. 허랑방탕하다라는 것은 ‘아소토스’ ‘낭비적으로, 물절제하게, 방탕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곧 그 받은 유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가 비로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나라로 갔는데 뭐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만큼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서 아버지가 간섭할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고 싶었던 욕망이 그 아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산다고 하는 것이 그 아들에게는 그토록 원하는 바 였지만, 결국 그 삶은 방탕하게 되었고, 아버지 아들의 존귀함도 권세도 다 잃어 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다른 사람의 돼지를 키우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먹지도 않고 이를 키우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미천하고 부정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아들이 떠날 때에 그를 막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고 아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아버지의 교훈과 돌봄 아래에 있을 때에 그 자녀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자녀들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존귀함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할 때에 그는 허랑방탕하였고, 그 재산을 낭비하고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재산만 낭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간을 낭비하였고, 그의 힘을 낭비하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받은 그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도리어 낭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면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아버지의 뜻없이 살아가는 자의 모습은 도리어 헛된 것을 위한 수고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아가고 싶은 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 자신을 위한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삶도 그 아들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위해서 옆에서 교훈하고 돌보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손해보는 삶을 산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사는 것이 곧 나를 위해 사는 것임을 그 아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이 낭비되어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2. 그런데 둘째 아들의 삶이 다시 존귀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죄된 모습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둘째 아들은 가진 것을 다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픈 것은 여전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고 먹고 싶었지만 이를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아버지의 집이 떠 올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이 풍성하게 먹으며 지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한 행동이 얼마나 죄된 행동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행한 죄가 있으니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라도 아버지 집에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려고 길을 떠납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온 그 먼 길을, 이제 아버지를 찾아 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아들로 대접받을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품꾼으로 살아갈 것을 기대하며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나왔는데 이제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으러 갑니다. 품꾼이라고 하면 주인이 시키는 일에 좋던지 싫던지 꼭 따라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품꾼이 되기까지 아버지집에 있겠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심합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살길이라는 것을 아들은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아버지가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에 있는데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가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봅니다. 그를 정죄하기 보다는 측은한 마음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잇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리 간 아들을 찾아서 데리고 올 수도 없음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그 아들이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고 스스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고, 기도하며 그 아들을 아버지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올 때에 그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그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로 향하여 와서 안고 입을 맞출 때에, 자신은 이러한 취급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아들이 행한 행동은 벌을 받아야 할 일이지만,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에 그의 아들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슨 염치로 왔냐고 다시 내 쫓지도 않고, 품꾼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 둘째 아들을 위해 제일 좋은 곳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돼지를 치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 자녀로서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그 자식을 위해서 즐거워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기에 합당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아들이 더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대우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께를 가까이하며 은혜의 삶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받고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 당연히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가 행하신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로 받아들여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은혜요, 그와 함께 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것은 우리가 그럴 만한 존재라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가진 기쁨인 것입니다.
3. 그리고 또한 아버지가 기뻐하는 자녀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마지막 부분에 첫째 아들이 나옵니다. 그 아들이 일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는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첫째 아들이 종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보니 동생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기쁘게 맞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말해 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첫째 아들이 노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즐거움에 동참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누구에게 노한 것입니까?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을 찾아오자 그 장남은 아버지가 자신을 합당하게 대해주지 않았다고 노여워합니다. 아버지를 여러해 잘 섬겨 명을 어김없이 했는데,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내 벗과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버지의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시니 너무 불공평하다고 화를 냅니다.
노여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합니다. 그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 마땅히 행한 일은, 그로 인해서 노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모두가 기뻐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아버지를 떠나 살았어도, 이를 회개하고 그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기뻐하며 맞아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분인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며 떨어져서 살아가고 싶지만,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더 큰 은혜로 우리를 받아 주시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 같지만 그 아버지와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31절에,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그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그 어느것보다 복된 일이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주님과 더욱 가까이 하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존귀한 주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와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의 즐거움에 취해 주님 주신 것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존귀함과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관계를 즐거워하며 당신의 가르침과 돌봄을 귀하게 여기는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풍요를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인생을 허비하고 죽어가는 자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과 떨어졌을 때에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주님의 자녀의 존귀함을 잃어 버리는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인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의 유혹과 즐거움들도 많이 있고, 또한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우리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셨음을 은혜로 여기며, 하나님 아버지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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