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가족들과 헤어진 후, 형들에 의해 외국에 종으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래서 요셉은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총리로 세우신 것은, 그를 개인적으로 영화롭게 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 오게 하셔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왕성하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때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형들과의 관계입니다. 형들은 자신을 악하게 대하며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과의 더 많은 관계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드디어 요셉과 그 형제들이 재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악하게 대한 형들을 대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특별히 자신에게 커다란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 할지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있음을 깨닫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이때 요셉이 깨닫게 된것은 형들과의 재회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꿈을 보여 주시며 계획하신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앞으로 있을 칠년 흉년을 대비할 책임을 지고, 애굽의 총리로 바로왕의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해몽한 대로 애굽에 칠년 풍년이 들더니, 곧 이어서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 흉년은 애굽에만 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의 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흉년이 이년 쯤 되었을 때에 야곱의 집에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는 아직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오게 되고, 곡식 판매를 담당한 총리를 만나 그 앞에 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절한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에게 절하는 사람이 자신의 형들인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자신이 꾼 꿈을 생각합니다.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이 묵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 말입니다. 사실 요셉은 이 꿈으로 인해서 형들의 더 큰 미움을 받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계획하면서 하는 말이,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고 합니다(창세기 37:20).
그런데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형들은 자신들이 절하는 대상이 자신들이 죽이고자 했던 동생, 요셉인 것을 알지 못했지만, 형들은 오래 전 요셉의 꿈과 같이 요셉에게 절을 한 것입니다.
요셉과 형들의 오랜 후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작정하셨던 것이고, 이를 꿈을 통해서 밀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요셉과 형들과의 만남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을 만난 것, 보디발 시위대장과 그 아내를 만난 것, 감옥에서 간수장과 바로왕의 관리들을 만난 것, 그리고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들은 사람으로서는 계획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요셉과 관계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이들과의 만남 속에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때로 요셉의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와 같이, 고난을 주는 사람을 우리가 만난다고 할지라도,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만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자는 서로의 만남에 대해서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귀중하게 여기고 책임감있게 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오늘 읽으신 말씀을 보면, 요셉이 그 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드디어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막내 동생 베냐민이 자신의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서 인질로 가두겠다고 합니다. 그 때에 형들은 그렇게 하면 아버지 야곱이 슬픔 중에 죽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며, 자신들이 막내를 대신하여 종이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보던 요셉은 울음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고 큰소리로 울면서 밝힙니다.
그런데 그 때에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이 됩니다. 성경에는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싸-해진 겁니다.
오래간만에 동생을 만났지만 반가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요셉의 말을 들은 형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들을 스파이라고 주장하며 고난에 처하게 했던 애굽의 총리가, 다름아닌 자신들이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 넘긴 동생 요셉이라고 하는 말에 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사실, 요셉에게는 형들과의 관계속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서 커다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1:51절에 보면, 요셉은 첫째 아들을 낳은 후에 그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은 ‘잊어버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아버지 집에서의 일들은 잊어 버리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만큼 형들과의 기억은 아픔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을 낳고서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합니다. 에브라임의 뜻은 ‘창성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 고난의 아픔을 극복하게 해 주신 분이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크고 작게 요셉과 같은 고난의 기억속에서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가정이나 학교에서 학대를 받고 그 상처를 가지고 평생에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에 나와서 차별과 무시, 억압 속에서 신음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형들에 대한 아픔에 얽매여서 원한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면, 형들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그러한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과거의 아픔에 사로 잡혀, 현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30: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유다백성들에게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아픔과 상처가 있을 때에 그것에 붙잡혀 사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내어 맡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형들을 만난 요셉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이제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이 처음부터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보면,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에 요셉의 첫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만약 요셉과 같이 아버지의 백을 믿고, 자기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동생이 있다면, 정말 약오르고 미울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은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다가 보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다른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형들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과거의 고난을 잊고 극복했지만, 형들은 아직 과거의 잘못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것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악한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일이라면서 불안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에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징벌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동안 형들을 대하면서 형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보면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품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나아가서는 종으로 팔아 버린 형들이 저지른 죄악이 도리어 형들을 정죄하고, 억누르고 있음을 요셉은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형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이 그 아픔에서 벗어났듯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며 이를 풀어주는 일들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형들을 살리시고자 하신다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요셉은 45:7절에,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고 말합니다.
형들은 요셉이 자신이 가진 세상 권력으로 형들을 해할까봐 두려워했는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력을 주신 이유가 형들의 악함에 대해서 정죄하고 처벌하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하심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죄인까지 살리고자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못박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해하고 죽이는데 쓰고자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신 형이라는 위치와 단체의 힘을 가지고 자기가 미워하는 이를 시기하고, 죽이고자 하는데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살리라고 부여받은 힘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해하는 일에 사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안에서도 상처받은 이들이 있고, 도시와 국가안에서도 아픔을 호소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로하고 그 아픔에서 해방시키는 일들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와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력과 물질, 지식, 재능을 주셨을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자신들의 뜻을 위해 다른 이들을 해하고 억압하는 일들을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신경쓰는 이들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관심하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갔을 때에, 요셉에게 그 고난의 아픔을 잊게 하시고 번영케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셉과 같이 나를 해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아픔을 돌아보며, 도리어 그들을 품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십니다.
히브리서 4:15-16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 어느 사람들보다 사람들로부터 깊은 상처와 아픔을 받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을 당했기에 도리어 죄인된 사람들의 아픔을 더 이해하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요셉과 같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아픔을 경험하면서 살았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깝게는 요셉과 같이 가족안에서, 그리고 직장과 사회안에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픔을 당할 때에, 또한 상대방의 상처와 아픔을 살피며, 이를 품고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이 땅에 여러가지 이유로 신음하며, 서로간에 원망이 많은 이 때에, 서로의 힘듬을 살피고 위로하시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위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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