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들은 철새이기 떄문에, 추운 겨울이 오게 되면 따뜻한 곳으로 무리를 지어서 이동합니다. 그리고 기러기 무리들이 날아갈 때에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기러기들이 V자 대형으로 줄을 지어 날아갈 때에 가장 앞서 나는 것이 가장 힘든데 기러기들은 앞에 있는 기러기가 지치면 다른 기러기가 그 자리를 바꿔줍니다.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는 힘이 들지만 뒤따르는 새들은 공기의 저항을 50%나 덜 받습니다. 그래서 기러기 혼자 비행할 때보다 71%나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기러기 무리들은 그들앞에 놓인 짐을서로 지고 감으로 목적지까지 함께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교회도 기러기 무리와 같이 짐을 서로지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서, 짐을 서로 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무거운 짐으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함께 져야할 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안에 있는 짐을 서로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은, 우리 각자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짐을 질 때에 우리의 온 몸이 함께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짐을 등위에 얹을 때에 등만 그 짐을 담당하지 않습니다. 팔은 그 짐을 붙들고, 다리는 짐과 온 몸을 지탱합니다. 온 몸이 그 짐을 지기 위해서 크고 작은 자신들의 역할을 할 때에 그 짐을 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의 짐을 서로 지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됨으로 견고히 서가는 과정이 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속에 있는 뜻을 나누면서,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교회로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갈 때에, 함께 지어야 할 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서로의 죄, 잘못함입니다. 바울은 누군가 범죄한 일이 있으면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죄된 일이 있었을 때에 이를 바로잡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의도적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실수나, 아니면 우발적으로 저지른 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는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지만, 자신의 행동이 죄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도 있고, 때로는 우발적으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죄의 짐들을 서로 지는 곳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말하 말합니다.
바울이 사용한 ‘바로 잡다(restore).’ 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을 제대로 돌려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찢어진 그물을 기워서 원래 상태로 돌려 놓거나, 몸에 어떤 뼈가 탈골 되었을 때에 이를 제대로 끼어 맞추어 몸을 온전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몇 달 전에, 한 교인으로부터 아침 일찍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제가 아는 치과 의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전날 밤에 턱이 빠지셔서 고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다니시는 의사를 소개시켜 드렸고, 그 의사는 그분의 어긋난 턱뼈를 제자리로 맞춰 드렸습니다.그분이 다시 전화를 주셔서 지금은 아주 편하고 좋다고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턱뼈가 탈골이 될 때, 턱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그로 인해서 아프고 불편합니다. 그러기에 탈골은 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온 몸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긋난 뼈로 인해서 온 몸에 통증이 오고, 그 몸의 온전함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몸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온 지체는 잘못된 부분이 제 자리로 돌아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에 무지함으로 인해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수고도 있어야 합니다. 때로 믿음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는 이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이 때는 그 사람이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변의 지체들이 도와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죄에 대해서 분별하고 그것에 대항해서 잘 설 수 있도록 할 때에, 그리스도의 온 몸이 온전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들이 죄를 범한 지체를 위해서 함께 그 짐을 서로 질 때에,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로 서가는 것입니다.
2. 사도바울은 '바로 잡으라(restore)' 고 말하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죄를 범한 이를 바로 잡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를 범한 사람을 바로 잡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잘못함을 바로 잡을 때의 태도는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상대방의 잘못함을 보았을 때에, 정죄하는 마음으로 거칠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때로는 더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고, 믿음의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더욱 과격해지고 거칠어지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잘못을 볼 때에 온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의 마음을 가지고 분노하며 상대방을 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는 공동체가 온전히 회복될 수가 없고, 더욱 큰 상처와 아픔으로 분열될 따름입니다.
잠언 15:4,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생명의 힘은 온순한 혀, 온유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한 부분이 다칠 경우가 있습니다. 새끼 손가락이 다치게 되면 온 몸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 새끼 손가락이 온 몸을 아프게 한다고, 몸이 그 손가락을 정죄하거나 거칠게 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다른 몸의 지체들은 그 손가락이 더 아프지 않게 특별히 신경써서 부드럽게 대합니다. 새끼 손가락이 할 일을 다른 손가락이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친 손가락이 빨리 회복되어서 온 몸이 온전해 지도록 다른 부위들이 힘을 씁니다.
사도 바울도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합니다.
온유라는 의미에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온유함이란 무기력하고 연약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온유함은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이 온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야생마를 길들이는 비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야생마는 거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들고 뛰는 강한 힘이 야생마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생마를 잡아서 잘 쓰기 위해서는 그 거친 상태로는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련사가 그 야생마를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주인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야생마의 힘이 주인에 필요에 의해서 잘 조종되고 다스려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온유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보면 온유한 성품과는 먼 사람입니다. 모세는 혈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있을 때에,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애굽의 병사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합니다. 야생마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살인으로 인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40년 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야생마와 같았던 모세를 온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유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죄지은 사람을 바로 잡기 위해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바로 잡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으로 순종하는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감정과 생각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드러운 심령을 가지고서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온유한 마음의 사람을 “성령에 의해 사는 너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그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앞서 자기 자신이 성령님에 의해서 잘 통제받고, 다스림을 받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다른 이들의 범죄함을 볼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우리도 그러한 시험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의 죄를 범함을 볼 때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러한 죄를 범할 가능성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보면서,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은 자신은 참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인 것 마냥 생각하며, 범죄한 사람을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을 자신하며 살아갈 때에 도리어 죄지을 가능성에 더욱 가까와집니다.
어느 누구 할것없이 우리는 죄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4절에 보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구원한 후에 자신은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할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죄성을 늘 경계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수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다른 이들의 짐을 서로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그 짐을 잘 질만한 사람으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 짐을 잘 감당할 수 있을 때에, 또한 다른 이들의 짐을 위해 맡겨진 자신의 부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Carry each other's burdens)"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다른 이의 짐을 함께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에, 이를 정죄하며 외면하시기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온유함으로 죄인들을 죄로부터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그들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한하신 능력을 통제하시고, 온유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보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그분의 법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짐들이 있습니다. 죄의 짐들도 있고, 또한 서로 협력해야 할 사역의 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짐들이 있을 때에, 우리가 서로 온유한 마음으로 그 짐을 함께 질때에 그리스도의 몸이 제대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각자의 맡겨진 짐을 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서로의 짐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짐을 서로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교회로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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