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시작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죄인인 나를 위해서, 아무 댓가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예수를 믿음으로 신앙의 여정이 감사와 기쁨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분들을 보면 뭔가 다릅니다. 얼굴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그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속에서 감격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은혜받은 분들의 모습만 보면서 나도 저렇게 은혜 충만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은혜받으셨다는 분들로 인해서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받으셨다고 하는데, 그 분들의 삶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옛날의 죄된 모습이 나타날 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경험하는 바일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단하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내 성질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항상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내 안의 죄성이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기 보다는, 내 감정과 생각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실망하기도 합니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교인들을 보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1절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로마 교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죄가 사함받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보면서, “너희들이 은혜를 더 경험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라고 반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으면, 더 이상 죄가운데 머물러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누리지만, 여전히 죄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하는 반복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은 이들이, 죄에 머물지 않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더욱 살아갈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자가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3절에서, 로마교인들에게 묻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부터 씻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내 죄를 회개했을 때에 내가 지은 죄가 용서함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씻어주셨음을 고백하며,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것과 같이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건이 세례입니다.
4절에 보면, 이를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만 바라보고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따라서 자신도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에 머물지 않고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죄에 대해서 죽지 아니하면 여전히 죄에 머물게 되고 죄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은혜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은혜를 기쁨으로 누리며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죽으셨듯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는 일입니다. 사람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처형법 중에 ‘부관참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이 살았을 때에 저지른 죄가 나중에 드러났을 때에 내리는 형벌입니다. 그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서 이미 죽은 사람의 죄를 벌합니다. 그 죽은 시체를 향해서 그가 저지른 죄를 고발하고 그 몸에 처벌을 가합니다. 몸을 채찍질 하기도 하고, 목을 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사람에게 그러한 형벌을 가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처형은 그 장면을 보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의미가 있지, 세상의 아무리 강력한 권세자라고 할지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소용없습니다.
1. 죄인된 우리가 죄의 다스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에 대해서 죽을 때입니다.
서울에서 밤에 유흥가 주변을 다니게 되면 호객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호객하는 분들의 말에 반응을 보이거나 어정쩡하게 있으면 곤란해 집니다. 그분들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단호하게 지나쳐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은, 나에게 죄된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났을 때에, 죄의 유혹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나의 죄된 감정과 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3절에,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부인하고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정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옳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대단한 존재처럼 생각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근거해서 살아가게 되면, 내 죄된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수님을 좇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나를 부인하며 죽일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죽는 삶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는 자랑이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것도 한번 죽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즘, 좀비 영화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좀비를 보면 긴장되는 것은 주인공이 좀비들을 죽인 것 같은데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도 그러한 성향이 있습니다. 오늘 내 자신이 죄에 대해서 죽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날 보면 나의 죄성이 나를 다스리려고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 죄에 대해서 죽지 못했다고 너무 실망하여서 죄에 대해서 죽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정말 죄에게 패배당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죄에 대해서 날마다 죽을 때에, 이것이 훈련이 되어서 죄를 다스릴 수 있고, 죄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죄에 종노릇하며 죄에 머무르는 삶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죽을 뿐만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형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둘이 각각 준비한 제사를 드리는 동안 불편한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가인의 마음속에 동생 아벨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사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아벨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아벨에게 화를 낸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안에 있었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죄성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경고하십니다.
창세기 4:7절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인에게 있는 죄성이 그를 다스리려서 죄를 짓게 하려고 하니, 그 죄의 유혹을 따르지 말고 그것을 도리어 다스리라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때로 죄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그 때에는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의 말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죽은 듯이 반응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어 반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는 가인에게 더 분노하라고 부추기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화난 얼굴을 풀라고 하십니다. 죄는 동생 아벨을 죽일 정도로 미워하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더욱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지만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셨으니 잘 했다고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는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죄된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실 만한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며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반응할 때에 우리는 죄에게 종노릇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1. 사도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 때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아,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죄에 대해서 죽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교회에 미친 사람으로 성자 어거스틴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처음부터 성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었지만, 어거스틴은 그 당시의 세상 문화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주 똑똑해서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이기도 하였고, 황제를 대신해서 연설을 하는 궁전 웅변가도 일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집을 떠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있는 카르타고에서 살면서 젊은 시절에 술과 성적인 즐거움에 빠져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니교라는 종교를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황제의 웅변가가 되어 었고 황제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386년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다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은 정원을 거닐면서 괴로움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왜 지금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가 없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담장 넘어서 "들고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들려 옵니다. 그 말을 듣고 어거스틴은 성경책을 찾아 성경을 펴게 되었고, 로마서 13: 13-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깨닫고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에 어거스틴은 그를 얽매였던 정욕과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그가 길을 갈 때에, 전에 알고 지내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을 보자 따라오면서 "여보세요! 당신은 어거스틴이 아닙니까? 왜 요사이는 놀러 오지 않습니까?"하며 물을 때,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아니하고 "당신이 전에 부르던 그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에 머무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죄의 유혹에는 죽은 자 같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새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예수님과 같이 죄에 대해서 죽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매 순간마다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왜곡된 생각과 감정을 주장하여서 우리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곧 죄의 본성가운데 끌려 가는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옳고 바른 것 같더라도 이에 대해서 의심하며,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는 일입니다. 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장하심에 반응하면서 살아갈 때에, 죄에서 벗어난 새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날마다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생명으로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변화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