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로이걸(Pieter Bruegel, 1528-1569)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 중1568년에 그린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 ” 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잡고, 때로는 지팡이를 잡고 줄줄이 가는데 모두 다 장님입니다. 그런데 맨 앞에 가던 장님이 구덩이에 빠졌고, 바로 뒤에 장님도 넘어지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런데도 뒤에 있는 장님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앞 사람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따라 오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너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맹인에 관한 비유를 토대로 한 그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으로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맹인이라고 하면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를 갈 때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길이야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길을 찾아 가겠지만, 처음가는 길은 사람의 인도를 받거나 잘 훈련된 개의 도움을 받아서 갈 수 있습니다. 맹인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을 인도할 만한 상태의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덩이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적인 맹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맹인의 상태를 비유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그 당시 다른 이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상태를 풍자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인도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영적인 어둠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종교 지도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영적으로 어둡다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맹인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맹인에 관한 비유는, 다른 사람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 눈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눈에 뭔가 들어가게 되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모두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 마을은 비포장 도로가 많아서 그런지,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불어 눈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눈을 비비면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두 손가락으로 제 눈을 크게 여신 다음, 입바람을 눈을 훅 부십니다. 그러면 엄청난 바람이 눈에 느껴지고, 그 이후에는 눈이 괜찮습니다.
그런데 만약 눈의 티끌을 빼주는 사람이, 자신의 눈에 들보가 들어가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 일이 쉽지 않고, 도리어 눈을 상하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눈의 티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 티끌이라는 것은 결점, 허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그것을 비판하며 훈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의 눈이 어두운 상태라고 한다면,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티가 눈에 보이게 될 때에 그것을 빼주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기 자신의 상태를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사회가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혼돈과 다툼이 더 많아져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일하는 일터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록 그들의 티를 더 보게 되겠지요.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그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다른 이들에 대해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상태를 먼저 살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볼 때에 얼른 빼주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반문하십니다. 다른 이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모습보다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있는 티는 잘 보입니다. 앞에서 대화하는 사람의 이빨에 고추가루가 낀 것을 보고, 말해 주어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빨에 고추가루가 낀 분은 편안합니다. 제가 자주 듣는 말중에 "여보, 어깨에 떨어진 비듬 좀 보세요. 어깨가 하예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어깨에 떨어진 비듬을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스스로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다가 보니 상대방의 티끌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티’라는 것은 카르포스/Karphos)’ 마른 줄기나 잔가지, 짚을 말합니다. 눈에 작은 먼지도 불편한데, 짚같은 것이 들어갔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눈을 가리겠습니까?
그리고 들보는 도코스(dokos) 이것은 지붕을 받치기 위해 두 기둥에 가로질러 걸쳐 놓은 나무입니다. 지붕을 받치는 나무이니 이 들보는 강하고 굵은 나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사람눈에 이 들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들보에 시야가 가려서 앞을 못보는 소경과 같은 상태입니다.
텔레비젼에서 게임하는 것을 보았는데, 생일에 머리에 쓰는 꼬깔모자를 가지고 하는 게임입니다. 꼬갈 모자 뽀족한 끝을 가위로 잘라 조그마한 구멍을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얼굴 앞에 씁니다. 그리고 꼬깔콘 끝에 뚫린 조그마한 구멍을 보고서 축구를 하라고 공을 줍니다. 그러면 눈이 크던지, 시력이 좋던지 상관없습니다. 꼬깔 모자에 의해 시야가 확 줄어 들고, 오로지 조그만 구멍만을 통해서 보아야 하기에 골을 넣기는 커녕, 축구공을 찾기도 힘들어서 난리가 납니다. 축구공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곧 잃어 버려서 헤매기 일수입니다.
그러니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 상대방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남의 티를 빼주려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합니다.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와 같은 것들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지함이나 편견들이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티끌이 보일 때에 내가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내 자신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2. 사람이 스스로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다투게 될 때에 누가 옳은 사람처럼 느껴지십니까? 자기 자신이 맞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판단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보기에는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기초한 가치관과 행동은, 내 자신은 옳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나를 맹인으로 만들어 내 눈에 있는 들보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내 들보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내 심령을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시각으로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살피시듯이,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내 자신을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을 문제 삼으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죄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할 때는, 내가 너무 선하고 옳다고 여겨질 때입니다. 그럴 때에 도리어 내 눈에 들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눈에 들보가 있는지를 살피고, 이를 제거하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눈에 티끌이 보이고 이를 빼려고 할 때에는,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2절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의 들보를 그대로 두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지적한다면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을 고치기 전에 자기 자신을 고쳐나가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눈의 티를 빼주기 위해서는 또한 선한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때로 다른 이의 잘못된 점을 고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동기가 있다면 이 또한 내 눈을 가리는 들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으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입을 낸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의 티를 보았을 때에, 내 안에 선함이 작동되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안에는 편견과 외식, 비판하는 생각, 부정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안에 있는 선함이 있습니다.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돕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부정케 된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의 티끌을 빼주겠다고 덤벼들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아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다른 이들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게 하시고, 이를 빼 주셨던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티끌을 볼 때에, 우리는 그 티끌로 인해서 아파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깊은 아픔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눈에 있는 티는 힘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더 깊은 상처와 아픔이 남게 됩니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티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눈에 티를 볼 때에 우리의 선한 마음이 작동되기를 원합니다. 상대방을 긍휼하게 여기며, 다치지 않게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에게서 보이는 눈의 티, 결점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거하겠다고 공격적인 자세로 대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눈에 있는 티는 아프고 상처나기 쉬운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네 눈속에 들보가 있음을 살피라고 합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나의 들보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를 주님의 말씀속에서 조명하고 제대로 된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의도로 다른 이들의 티를 제거해 주고자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그 티로 인해서 아파하고 힘들어 할 것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있는 연약함과 아픔을 보면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큰 죄와 허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이를 선한 의지와 사랑으로 바라봐 주셨습니다. 죄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 티가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나 자신을 살피라고 하는 주님의 싸인이실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을 먼저 살펴 들보가 있는지를 살펴 온전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있는 티를 볼 때에 선한 마음으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가 온전케 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행함으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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