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성 입성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평범하게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찾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면 입성하셨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려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몰래 올라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심으로 자신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저 분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로구나” 라고 바로 알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날 유명한 사람들이 오게 되면 레드카펫을 깔아서 그 예우를 갖추게 되는데, 이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깔고 그 위를 지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고, 예수님을 둘러 싸고 호산나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생각할 때애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도리어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며칠 지나면 ‘호산나’외쳤던 사람들이, 도리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칠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이라고 외치는 우리들에게도, 혹시나 이천년전 무리들과 같은 어리석음이 있지는 않을지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구세주라고 외치는 신앙은 어디에 근거해야 할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의 입성은,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분임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합니다.
그 모습을 못마땅히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산나를 외치는 그 무리들이 며칠 후에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외침을 거부하지 않고 마땅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인기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그 때에 꼭 들려져야 할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외쳐져야 할 외침은,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는 외침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헤롯이었고, 헤롯은 로마의 황제에 의해서 세움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막강한 왕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이요, 주인으로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이렇게 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왕이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외쳐져야 할 외침은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외침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외침은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에 천사들이 노래했던 내용을 연상시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천사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리고 수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땅에 하늘의 평화를 임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에 천사들이 이를 찬송했는데, 이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이루실 평화와 영광을 외치고 있으니 참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금방 천지가 바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왕의 자손인 예수가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평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왕 때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질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선동당할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외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 그런데 이 무리들의 호산나 외침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며칠이 못되어 예수님께 “호산나” 라고 외치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외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신 며칠 후, 군중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침뱉음을 받고 주먹질을 당하는데도 무기력하게 있는 예수를 그들은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속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가 없음을 알고, 그를 놓아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무리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외칩니다. 빌라도 총독은 무리들의 모습을 보고,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갔지만,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일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도록 그분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기대하는 구세주의 역할을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했을 때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외쳤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바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왕과 같은 강한 권세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부터 해방시켜, 이스라엘을 평화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자신도 스스로 구원치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합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실, 무리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해할 만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메시야의 오심을 바랬고, 특별히 나라가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컸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메시야라고 말하며 나타난 사람들도 있었고, 백성들은 그들에 의해서 선동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로마사람들에 의해서 진압당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을 때에 백성들의 실망감도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런 무기력한 사람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쳤던 자신들의 모습이 도리어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실망감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할지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방법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강력한 힘으로 다른 이들의 힘을 제압함으로 구원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평화가 도래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정반대였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힘으로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고, 그가 죽으심으로 이 땅에 구원을 이루시고, 평화, 영광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착각 중에서 하나는, 이 땅에 평화와 하늘의 영광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에 관한ㄴ 것입니다. 강력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 사람들을 제압함으로 평화와 영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가롯유다와 대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이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53-54)
이 땅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세상의 육신의 세력을 힘으로 제압한다고 구원과 평화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무력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구원은 더 큰 폭력과 분쟁을 유발합니다. 평화와 영광이 아니라, 폭력과 멸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정한 구원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자신이 메시야임을 보여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메시야로서의 완성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땅의 구원은 예수님이 살아서 강한 권세를 발휘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서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이 사회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 평화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이룰만한 강력한 지도자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 일을 이루겠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도리어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폭력이 있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 땅에 진정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통하여 이 땅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하며, 그가 이루신 평화와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분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방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베드로의 고백을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가롯유다는 그 믿음의 고백을 같이 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더 이상 구원자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제사장들과 로마의 세력에 붙는 것리 자신이 살길이라고 여겼습니다. 돈이라도 챙기는 것이 자신이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을 했지만, 예수를 안다고 하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심으로 죄로부터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여전이 그 환난가운데서도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이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영광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의 평화와 영광은 세상적인 권세와 물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에 분쟁과 갈등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 땅에 평화와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나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살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를 죽이고 사는 것이, 무기력해 보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지만 그것이 우리 가정과 이 사회를 살리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분은 우리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이 구원받게 되고, 이 땅에 하늘의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끝까지 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왕되심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왕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은 내가 기대하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평화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땅에도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 교회 사회가운데 임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가신 구원의 길을 걸어갈 때에 ,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위축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평화, 영광은 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개인, 가정,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호산나의 외침이 환경에 따라서 변질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과 방법에 순종하고 살아감으로, 주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참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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