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을 만나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8:7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이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고자 하셨던 이유는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인지, 아니면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그 전의 삶인 어부로 복귀하러 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리로 간 이유가 무엇이던지 상관없이,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실패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그들은 제자로서 핮지 말아야 할 일을 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대제사장의 여종의 추궁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한들 무슨 면목으로 볼까하는 불편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모른체하고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제자로서 실패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 오신 줄을 몰랐습니다. 고기가 그물을 들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 후에야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한 제자 알아봤습니다. ‘주님이시라’ 라는 말에 베드로는 즉각 반응합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토록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열두제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치 않게 살아가는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오랫 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일들을 종종 경험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스승인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스스로에 대해 실망이 되고,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형편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그렇개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감람산에 가셔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라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무리가 왔을 때에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드로의 말이 지켜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종들이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할 때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하며 세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연약함과 무지, 두려움에 대해서 모를지라도 예수님은 이를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존재로 생각되어지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존재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연약함에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연약함은 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서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어느 한 순간 실족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제가 한 말을 돌이켜 보며, 지혜롭지 못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속상해 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 무지함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로 올 때에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본격적인 만남이 해변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구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들이 잡은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하시고, 그들에게 아침을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잡지 못한 그들의 지치고 피곤한 몸을 예수님은 먹이셨습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따뜻한 음식하나가 얼마나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신 것은 그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거나, 아침 식사를 해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조반을 다 드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번씩이나 물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합니다.
한국어와 영어 성경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할 때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모두 같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이 쓰이고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필레오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끼리 사랑하는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미국도시 중에 필라델피아 란 이름이 있는데, 여기에서 필라 라는 단어는 우정같은 사랑, 델피아 는 형제지간을 의미해서, 형제지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면서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가페의 사랑을 대답하지 못하고, 필레오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께 아가페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내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 지라도 저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 고 말하며, 아가페의 사랑하겠다고 자신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다시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 그에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다른 것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예수님과 같이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물으신 다음에 이어서 하는 말씀이, 내 양을 치라,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 양들은 어떠한 양들이 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이었습니다. 그것도 목숨을 다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상상이 되십니까? 자신의 생명이 양들의 생명보다 더 귀중할진대 선한 목자는 자신의 목숨보다 양의 모습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그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양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증하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인데 고장난 창조물입니다. 창조주의 메뉴얼대로 동작하지 않는 피조물입니다. 말도 행동도, 생각도 고장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죄로 인해 고장난 사람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상대방이 어떠한 존재인가가 중요하지 않않았습니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까지도 용서를 구하셨던 분이십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확증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3.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들을 돌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사랑함으로 그 양들을 치고 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후 그에게 그의 양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해서 목숨까지 버리셨던 그 양들,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그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은 있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확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것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 때에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해서 한 것은 아닌데 실수가 있고,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사랑에 서툰 그의 모습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확증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한 힌두교도 여인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남편이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남편이 불평할 때면 마루를 더 깨끗히 닦고,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면 더욱 부드럽게 대답하지요. 선교사님,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된 후로 더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보여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이 삶을 통해서 확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에 많이 서툰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아서 악하게 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 전에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라는 말로 서로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베드로와 같이 사랑이 왜곡될 만한 실수와 연약함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의 서툰 사랑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다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김없이 사랑에 실패한 제자들까지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제대로 사랑을 확증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아가페와 같은 사랑을 자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목표로 해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확증이 될 수 있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랑에 서툰 이들을 향해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시며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연약함과 상처를 아시고 보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 무지함까지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주님앞에 나올 때에 주님은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위로해 주시고, 참 평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사랑으로 그들을 먹이고 돌보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그의 양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과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양들을 사랑함으로 확증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사랑의 모습보다는 미움과 갈등, 폭력의 일들이 더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더욱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의 양들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원하지만 제자들과 같이 서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이웃들에게 그 사랑의 확증하는 삶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가정, 교회, 이웃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들과도 같습니다. 사랑으로 먹이고 돌보고 섬김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그가 맡기신 이들을 통하여 확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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