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6/2021 - 사랑이 제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3:11-13]
제가 어릴 때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 중에 하나가, 가훈을 써 놓은 액자가 벽에 걸려져 있는 모습입니다. 온라인을 보니, 재미있는 가훈들이 꽤 있었습니다. “주식을 하지 말자, 보증을 서지 말자, 밥은 먹고 살자” “여자 말을 잘 듣자” “정상적으로 살자”
벽에 걸린 가훈을 보면 그 가정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어떤 분들은 재물, 지혜, 화목 등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은 세가지 중요한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없어질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그 만큼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세가지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바울이 왜 굳이 다른 것보다 사랑을 제일이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그토록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의 삶속에서 어떻게 성숙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과 소망, 사랑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애 믿음은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죄인인 사람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죄로인해 죽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로마서 8: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구원받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소망은 영생, 천국에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소망이 없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함으로, 구원의 여정을 절망하지 않고 성취하도록 합니다.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성도들은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의 여정을 완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둘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비교할 때에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믿음과 소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사랑이 먼저 있었기 떄문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구세주로 보내주셨고,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셨으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도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셨으니,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죄인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성품입니다.
요한일서 4:7-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한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고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지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과 같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 때에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난 성도의 과제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성장은 사랑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의 자신의 모습을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마치 자신의 어린 아이때와 같은 모습이었기 떄문일 것입니다. 아직 성장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렸을 때에는,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지금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성숙함의 기준을 무엇으로 두시겠습니까? 아마 영적인 은사들이 많다고 한다면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방런, 예언, 환상 등을 본다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선물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주는 사람이 나를 관심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징표지만, 선물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선물에 가장 관심하고 선물을 많이 받는 때가 어린아이 때일 것입니다. 그 때에 선물은 참 자랑거리가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선물을 받으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우리 아빠가, 엄마가 이거 사주셨어. 너희들은 이런 것 없지?” 말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교회안에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우월하다며 자랑하며,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지금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은 은사가 많은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받은 은사들을 사랑함으로 잘 사용할 때에 증명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사용될 때에 그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도바울은 자신의 어린아이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가 어린 아이 때에는,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 때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장성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영적으로 성숙할 수도록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을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말하는 것도 미성숙합니다. 주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말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사로 잡혀서,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성내지도(anger) 않는다고 했는데, 자기 중심적인 어린 아이들은 무례하게 행하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HEB에 물건을 사러 갔었습니다. 장을 보고 있는데 계산대 쪽에서 악을 쓰고 우리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쪽을 보니 카트 위에 올라탄 제법 4-5살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고집스럽게 큰 소리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카트를 끄는 엄마에게 뭐가 불만인지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 울어 댔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으로 인해 난처해하던, 다른 사람이 그 울음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장성하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어렸을 때에 그 일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말하는 것도 성숙하게 만듭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여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나 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겼겠지만, 사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10절에, 사도바울은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있고, 지식의 은사가 있을 때에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깨달은 것이 온전한 것 같아보이지만, 사실 부분적인 것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기에 다른 이들에 대해서 관용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이 장성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기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음에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이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에는 생각하는 것도 미성숙합니다. 어린 시절에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정체성도 제대로 형성이 안된 때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타자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단계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장성한 사람이 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장성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관심하게 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때에는 옳고 그른 것에 상관업이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자기 자신이 기쁘면, 그것이 불의하거나 다른 이들을 해하는 일이든지 별로 상관없어 합니다.
하지만 장성한 성도는 선과 악을 구별하며, 선한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며, 이를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말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심지어 박해하고 죽이는 일에도 동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거듭남은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던 어린아이와 같은 일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장성한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모든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세가지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언을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신앙의 문제가 있을 때에, 그곳에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소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문제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의 선물을 가지고서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미성숙한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장성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행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영적으로 장성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이르는 신앙인으로 늘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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